'노노재팬(일본 불매운동)'의 예외지대라고 알려진 보건의료계에도 그 영향이 확산되고 있다.
5일 의료계에 확인한 결과 일본 제약사의 전문의약품 처방을 자제하겠다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는 것. 단, 의약품 '처방' 행위가 환자의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재진 환자 처방변경 어렵지만 신환은 굳이…"
서울 J가정의학과 원장은 "안 그래도 근처 약국에서 처방약을 바꿔줄 수 없느냐는 전화를 받았다"며 "의사도 개인적으로 마음만 먹으면 처방 변경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같은 조건에서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요즘 같은 상황에서 일본 제약사 약을 굳이 쓸 필요가 없다"라며 "특히 신환이면 굳이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재진 환자를 대상으로 당장 처방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새로 오는 환자(신환)에게는 충분히 일본계 제약사가 아닌 타사 의약품 처방을 고려하겠다는 얘기다.
A대학병원 내과 교수도 "어떤 약이든 환자에 따라 부작용을 호소하기도 하고 효과가 부족하기도 해서 처방 약 변경은 쉽지는 않다"면서도 "개인이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신환한테는 처음부터 일본 제약사 약을 쓰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다 적극적으로 '노 일본(No Japan)'을 외치는 의사도 있었다.
경기도 Y내과 원장은 "일본 제약사 중 우익단체를 후원하는 기업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며 "신환에게는 가급적이면 대체약을 쓰고 재진 환자에게도 일본 의약품을 처방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혹시라도 불편하면 얘기해라 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환자에게 처방하는 약을 가지고 장난치냐는 비판도 있는데 건강한 삶이라고 한다면 양쪽의 의견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회라고 본다"며 "불매운동을 통해서 지향하는 바는 올바른 한일 관계 정립"이라고 덧붙였다.
일부 의료진들 의료기기 구매도 일본제품 거부감
또한 의료기기업체들도 최근의 현상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현재 한국시장에 의료기기를 공급하는 일본 업체는 ▲올림푸스 ▲캐논 메디칼 ▲테루모 ▲파나소닉 ▲펜탁스 ▲후지필름 ▲오므론 ▲코니카 미놀타 ▲히타치 등으로 그 수가 많지 않다.
게다가 이들 업체들의 초음파진단기·CT·MRI와 같은 의료장비와 치료재료 및 가정용 의료기기는 대부분 미국 유럽 한국 중국 제품들로 대체 가능한 상황.
업계는 일본산 의료기기 불매운동이 현실화되더라도 대체품을 찾지 못해 제품 수급에 어려움을 겪거나 환자 진료 공백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와 중에 일부 의료진들은 일본 의료장비 구매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일부 병·의원 의료진들 사이에서는 가성비가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C사의 MRI, CT 구매를 하지 말자는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는 것.
서울 H영상의학과 원장은 "C사 제품은 가격 경쟁력이 있어서 중소병원 등에서 많이 샀는데 대체품이 많다 보니 굳이 찾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라며 "비싸더라도 1억~2억원 더 주고 차라리 더 좋은 장비를 산다는 원장도 있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CT, MRI는 10억, 20억 규모라서 자주 구매하지 않다 보니 크게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최근 일본 자동차 불매운동과 비슷하다"고 귀띔했다.
이쯤되자 국내 진출한 일본 의료기기업체들은 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현재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지만 양국 간 무역 분쟁이 심화돼 자칫 의료기기로 불매운동이 번지지 않을까 지켜보고 있는 상황.
일본 의료기기업체 한국법인장은 "당장은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 양국 간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충분히 여파가 있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지금보다 일본 불매운동이 더 확산되면 병원 입장에서도 사회 분위기나 환자들의 시선을 고려해 일본산 초음파진단기·X-ray·CT·MRI와 같은 진단영상장비 도입을 주저하지 않겠느냐"며 "하루빨리 이번 사태가 잘 마무리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또 다른 일본 의료기기업체 이사 역시 "아직까지 장비 판매와 매출 하락 등 직접적인 영향은 없다지만 한·일 관계가 워낙 안 좋다보니 의료기기까지 불매운동이 확대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물론 일본의 일방적인 수출 규제나 화이트리스트 배제는 부당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환자 안전과 생명과 직결되는 의료기기까지 일본 제품이라는 이유로 불매운동을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위험한 발상"이라고 경계했다.
다만,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의 영역에선 불매운동으로 확산시키는 것은 지극히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올림푸스의 소화기내시경이 대표적 사례. 국내 소화기내시경 시장점유율은 일본기업인 올림푸스 펜탁스 후지필름이 1~3위까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독일 칼 스톨츠와 중국 소노스케이프 등 대체장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화기내과 의사가 성능 자체도 우수하거니와 수련 시절부터 사용해 손에 익숙한 일본산 내시경을 다른 제품으로 대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요원하다는 게 일반적인 의료진의 의견이다.
다국적기업 한 관계자는 "일본의 부당한 경제보복이나 화이트리스트 배제에 대한 정당한 항의의 의미로 공산품과 여행 같은 불매운동에 동참하는 것과 의사가 환자 생명과 직결되는 의료기기를 반일감정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이어 "일본 의료기기 불매운동이 벌어지더라도 의사들이 올림푸스 내시경을 대체해 다른 장비를 사용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며 "더욱이 내시경 포셉 등 소모품의 경우 이미 국산이나 중국산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불매운동의 의미 자체가 크지 않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