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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진단 AI 개발로 반전 꿈꾸는 디지털 병리"

발행날짜: 2021-06-07 05:45:50

정찬권 서울성모병원 병리과 교수
170억원 규모 코디파이 사업단 이끌어…항암 진단 플랫폼 구축
"발전 더디고 업무환경 열악한 악순환 고리 끊어내겠다" 다짐

지난 몇 년 동안 병리과는 젊은 의사들에게 외면받아온 대표적인 진료과목 중에 하나다. 근무시간 내내 진단을 내려야 하는 등 독특한 업무 특성으로 인해 매년 레지던트 모집에서 미달이 속출하는 것이 이제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이로 인해 대학병원에서 병리과 소속 레지던트를 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 돼 버렸다. 하지만 최근 빅5 대형병원 중심으로 이른바 '디지털 병리'로의 전환을 추진, 업무환경 개선으로 이어지면서 '비인기과' 꼬리표를 떼겠다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특히 '디지털 병리'의 가능성을 엿본 정부도 수백억원에 달하는 연구 과제를 발주, 개발에 나서면서 병리학계의 '유쾌한 반전'에 힘을 싣고 있다. 최근 가톨릭중앙의료원에 5년간의 과제인 디지털 병리 AI 개발을 맡긴 것이다.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병리과 정찬권 교수.
메디칼타임즈는 최근 정부의 '디지털 병리 기반 암 전문 AI 분석 솔루션 개발'권을 따낸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정찬권 교수(병리과)를 만나 의의와 향후 계획을 들어봤다.

"열악한 업무환경…AI 개발로 병리과 바꾸겠다"

사실 서울성모병원은 국내 의료기관 중에서 '디지털 병리'로의 전환이 가장 빠르게 추진되는 곳으로 꼽힌다. 한 해 8~9만건에 달하는 전체 병리검사 건수 중 70%를 디지털로 전환해 운영하는 데, 올해 말까지 100% 전환이 목표다.

이 같은 디지털 병리로의 전환은 병리과 업무 특수성도 원인이 됐다. 다른 진료과목들과 다르게 병리과 전문의들은 하루 종일 진단에만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타 진료과목 교수들은 일주일에 특정 외래 무료시간 외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받지만, 병리과 교수들은 종일 진단에만 매달려야 하므로 연구 등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레지던트를 포함한 젊은 의사들에게 외면받았던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로 인해 소위 빅5에 속하는 서울성모병원조차도 병리과 레지던트 뽑기도 쉽지 않은 현실이 됐다. 정찬권 교수는 이 같은 병리과 업무환경에서 비롯된 악순환을 이번 계기로 끊어보겠다는 계획이다.

정찬권 교수는 "병리과의 지원이 떨어지는 이유는 그동안 진단을 내리는 데 있어 의사 개개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했기 때문"이라며 "타 진료과목 교수들은 오전, 오후 외래시간 외에 연구 시간이 주어지지만 병리과는 하루 종일 진단에만 집중해야 하기에 업무환경이 좋은 편이 아닌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아쉬워했다.

코디파이 사업단은 서울성모병원을 축으로 많은 대학병원과 관련된 업체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이 때문에 병리과 전문의의 진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AI 개발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했던 상황.

때마침 보건복지부와 보건산업진흥원이 150억원의 연구비를 투자해 디지털 병리 기반 암 분석 AI를 개발하겠다고 나서면서 정 교수는 열악한 병리과의 업무환경을 개선할 기회라고 판단, 최근 개발권을 따내게 됐다. 여기에 개발에 참여하는 기업들이 20억원의 연구개발비를 추가로 투입하기로 하면서 170억원이라는 대규모 연구가 현실에 이르게 됐다.

정 교수는 "오해하는 것이 AI를 개발한다고 해서 의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병리 영역은 날이 갈수록 검체건수도 많고 복잡해지는 영역"이라며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의 진단을 보조해 10분 걸릴 행위를 단축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의사 행위를 대체하는 AI 개발이 현실화 한 적도 아직 없다"며 "이번 기회에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병리과의 업무환경을 개선하고 디지털 기반 시스템을 전국으로 활성화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기대했다.

"디지털 병리 기반 AI, 향후 신약개발도 쓰여야"

이에 따라 AI 개발을 위해 구성된 컨소시엄에는 서울성모병원을 포함해 아주대병원, 전담대병원, 충남대병원, 칠곡경북대병원, 부산대병원 등 지역 거점 대학병원들과 네이버와 필립스, 평화이즈 등이 참여한다.

사업단의 이름은 코디파이(CODiPAI, Collaborative Open Digital Pathology Artificial Intelligence Platform). 클라우드 기반의 개방형 병리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저장‧관리 및 분석‧활용 지원이 가능한 디지털 병리 데이터 플랫폼 개발 등이 목표다.

플랫폼을 통해 소위 빅5로 꼽히는 초대형병원뿐만 추진 중인 디지털 병리로의 전환을 전국으로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코디파이 사업단에 참여한 지역 거점 병원들의 경우도 현재 디지털 병리로 시스템 전환의사를 밝힌 곳들이다.

추가적으로 지역 거점병원뿐만 아니라 중소병원들의 '나 홀로 병리의사'들도 시스템을 활용하는 기회도 엿보겠다는 것이 정 교수의 구상이다.

정 교수는 "디지털 병리의 목표는 기존에 현미경의 의존하는 진단시스템에서 탈피하자는 것"이라며 "이번 AI 개발은 디지털 병리 변화에도 초점이 맞춰져 있다. 참여하는 병원들은 아직 디지털 병리 시스템을 도입하지 못했는데 이번 개발 참여로 더 수월하게 전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국내에는 병리 의사가 대학병원들에 집중돼 있다. 중소병원의 경우에는 1~2명 있기도 쉽지 않은 현실로 이들을 의료현장에서는 '나 홀로 병리의사'로 불린다"며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할 부분들이 많지만 플랫폼 개발을 통해 향후 이들에게도 원격 자문 등에도 쓰일 수 있도록 시스템 개발에 힘을 쏟을 것"이라고 포부를 드러냈다.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병리과 정찬권 교수.
마지막으로 정 교수는 이번 시스템 개발 관련 개인적인 소망도 밝혔다.

AI 개발이라는 과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향후 '병리 AI 활용 생태계' 마련의 기틀을 마련해보겠다는 것이다.

가령 영국을 포함해 유럽을 중심으로는 현재 디지털 병리를 활용해서 모아진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신약개발 연구를 진행하는 사례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번 AI 개발을 통해 국내에서도 이 같은 개발에 도전해보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 등 관련 연구에는 대형 글로벌 제약사가 해당 연구에 투자하며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을 정도로 관심이 크다.

정 교수는 "병리 AI를 개발, 이를 통해 빅데이터를 모으고 항암신약 등 개발에 활용하는 생태계 구축이 개인적인 목표"라며 "즉 디지털 병리를 활용, 신약개발에 쓰겠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병리 데이터를 모아서 항암제 임상시험에 활용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컨소시엄 발표 때 향후 AI 개발에 따른 활용방안으로 이를 설명한 기억이 있다"며 "우리나라도 늦었지만 못할 바 없다고 생각한다. 발전이 더디고 열악한 업무환경으로 비인기과로 불린 병리학계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