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학, 땡시, 포르말린 냄새. 이 단어들은 마법 주문이다. 어느 의대생을 붙잡아 외쳐도 공통적으로 해부학기에 대해 떠들게 만든다. 주변에 의대생이 있다면 쉽게 시전할 수 있는 하등 마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어떤가.
Variation. 해부실습의 경험이 있다면 시전할 수 있는 조금 더 고급 주문이다. 읽는 그대로 발음하면 소리도 제법 그럴싸하다. 이 주문은 앞서 본 세 단어보다 더 강력한 공감을 끌어낼 확률이 높다. 이 단어만큼 해부학기에 한창인 의대생들을 혼란스럽게 한 단어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상지실습을 하던 따뜻한 봄날, 실습수업의 목표는 brachial plexus를 찾는 것이었다. 나와 실습 조원들은 몇 시간 동안 샅샅이 파낸(?) 끝에 말단 신경에 이르렀는데, 배운 것과 다른 방식으로 신경들이 합쳐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럴 때, 아직 dorsal과 ventral도 헷갈리던 병아리 의대생들은 집단지성에 의존했다. 이 집단지성은 '난 틀릴 수 있어도 동기 중 하나쯤은 정답을 외웠을 거야'라는 막연한 믿음을 먹고 자란다. 그런데 실습조의 집단지성 역시 실습에서 발견한 구조물과 달랐고, 위기에 봉착한 우리가 할 수 있던 최선의 방법은 질문하기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교수님께 질문드렸더니, 교수님은 'variation' 한 단어를 남기고 훌쩍 떠나셨다.
Variation! 군더더기 없이 이 단어만으로 모든 형태가 정상이 되었다. 지식의 불확신을 깔끔하게 날리는 마법 주문. 이날 이후로도 우리는 이 단어를 수없이 접했고, 수없이 사용했다. 도무지 구조물을 찾을 수 없다면 variation, 구조물 모양이 이상해도 variation일 것만 같았다.
저명한 과학자이자 작가인 마이클 셔머Michael Brant Shermer는 '인간은 패턴을 찾는 동물이다'라고 주장한다. 낯선 무언가를 단순히 이미 아는 '패턴'의 variation 으로 치부해 버릴 때 느낀 큰 안정감은 위 주장의 좋은 근거일 테다.
해부실습에서 variation은 요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위기에 봉착했다. 임상의학이란 끝 없는 바다에 빠져보니 'A라면 B' 식의 직관적인 패턴에 모든 다양성을 담기에는 그 한계가 너무 컸다. 예컨대 '기침하면 감기'와 같은 단순한 틀로만 환자를 바라보고 치료하려는 안일한 생각 탓에 내 상상 속의 환자들은 끊임없이 사지에 내몰렸다. 이들의 값진 희생(?) 덕에 나는 환자의 나이, 성별 등의 기본 정보는 물론이고 병력, 직업력, 종교, 경제적 사정까지 환자의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 즉 환자 개개인의 다양성을 아는 것이 생(生)의 길로 인도하는 것임을 배웠다. 그렇기에 의대생은 더더욱 세상과 사람들을 배워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장자'에 "여름벌레는 자신이 사는 여름만 고집하기에 얼음을 모른다"라는 대목이 있다. 의대라는 세상만 안다면 우리는 겨울의 굶주림과 추위를 모른 채 춤만 추는 베짱이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겨울을 살지 못하는 베짱이들에게 백날 얼음을 설명해봤자 자기의 세상을 초월해 추위를 이해할 가능성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해를 바탕으로 겨울 동물들의 처지에 눈물 흘릴 수 있는 철학자 베짱이는 거의 없다. 그저 우리는 눈물은 흘리지 못할망정, 세상에는 다양한 계절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계절들에 사는 다른 생명이 많음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 다른 사회·세상에 사는 다양한 집단의 마법 주문을 여럿 익히는 것이다. 각 주문 뒤에 숨겨진 의미와 배경들을 알지 못해도 괜찮다. 다양한 패턴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환자와 의사 사이에 필요한 소통과 이해의 물꼬를 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야를 넓히려는 개인적인 노력(e.g. 독서, 대외활동)뿐만 아니라 의과대학의 교양수업 커리큘럼이 더욱 실용적으로 보강되어야 한다. 다양한 환자의 배경을 이해하고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좁은 세상 밖의 다채로움을 깨달을 때, 우린 비로소 병아리도, 여름 베짱이도 아닌 의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