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AI라고 하면 조류독감(Avian Influenza)을 떠올리던 때가 있었다.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달하며 이제는 AI를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으로 읽는다. 당시의 사회상과 용어(명칭)는 상호 의존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뜻.
이달 1일부터 FDC법제학회가 FDC규제과학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바이오가 부상하자 제약협회가 제약바이오협회로 이름을 바꿨듯 FDC규제과학회도 개명을 통해 '새로운 존재' 의의를 주창한 셈. 가속화된 신기술의 등장과 한발씩 늦는 규제당국의 대응에서 FDC규제과학회는 명칭에 걸맞게 합리적 규제 및 이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학회로서 자리매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의약품, 의료기기, 건강기능식품, 화장품까지 두루 포괄하던 학회가 기존의 틀에서 어떤 변화를 추구하게 될까. 무엇보다 막연히 접했던 규제과학을 학회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뭘까. 손여원 FDC규제과학회 회장을 만나 명칭 변경의 이유 및 향후 학회의 성격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명칭 변경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
학회는 2005년 한국의약품법규학회로 태동했다. 품질 좋은 의약품, 화장품, 의료기기 및 건강기능식품의 안전하고 합리적인 안전관리 체계를 확립하고 이를 위한 연구와 의견 수렴의 장을 만들고자 했다. 2010년 FDC법제학회로 명칭을 변경한 이후 10여 년 만에 다시 명칭을 변경하게 됐다. 벌써 대외적으로 10여년간 법제학회 명칭을 사용, 공신력 및 인지도를 쌓았기 때문에 이를 변경하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법제'라는 작은 틀 안에 학회의 역할, 존재 의의를 가두기에는 학회의 운신의 폭이 좁고, 무엇보다 신기술들이 빠르게 등장하고 있어 이에 대응하기 위한 새옷이 필요했다. 그런 까닭에 몇년 전부터 FDC법제학회 옆에 이미 규제과학(regulatory science) 명칭을 병기해 왔었다. 이번 명칭 변경은 급작스러운 변화가 아닌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의견 수렴 과정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 회원들 반응은?
명칭 변경은 회원들의 민의가 반영된 결과다. 앞서 지속적으로 회원들로부터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는 의견 및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회원들 과반 이상의 찬성 및 이사회에서도 충분히 공감을 얻어 지난 6월 18일 열린 임시총회를 통해 학회 명칭 및 정관 변경이 이뤄졌고 이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승인했다. 과거 법제학회 당시는 법제라는 좁은 개념에 갇혀 있어 학술 연구, 논의의 주제가 당시 실존하는 법령, 규제, 문제들로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학술대회 주제가 현행 제도에서 발생하는 규제 문제 등 단편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반면 규제과학은 미래 지향적인 개념이다. 새로운 개념, 기기, 기술이 등장하면 이에 적합한 규제 적합성을 따지거나, 신기술을 활용한 기기 및 의약품의 개발부터 새 규제 방향에 대한 논의가 진행돼야 한다. 이를 다룰 수 있게 학회의 외연이 넓어지고 지향하는 바가 명확해진 만큼 회원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학회의 성격이나 목표, 학술대회 주제에는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규제당국의 심사의 틀은 의약품, 의료기기 등으로 이원화돼 있지만 기술의 고도화와 맞물려 현재는 의약품과 의료기기가 융합된 융복합 제품이 쏟아지고 있다. AI를 장착해 영상을 판독하는 의료기기는 이를 소프트웨어로 혹은 하드웨어로 분류할지 애매한 지점도 있다. 코로나19 유행 상황처럼 존재하지 않던 mRNA 백신과 같은 새로운 개념, 제품이 등장하면 대응이 뒤쳐지는 문제가 있다.
이런 부분에서 규제과학이 필요하다. 의약품, 의료기기 등 규제 대상 제품들의 안전성, 유효성, 품질 및 성능 등을 평가하기 위해 새로운 도구, 기준 및 접근 방법 등을 개발하는 것이 규제과학이다. 새 제품 개발할 때부터 해당하는 물품이 현제 규정에 맞는 규제 적합성을 살피거나 아예 새로운 규제 및 지원제도가 필요할 수도 있다. 제도 작용 기전에 대한 이해 등을 폭넓게 다루게 된다.
타 학회의 경우 주제 분야가 의약품, 식품, 건기식 등으로 물품으로 구분된 경우가 많은데 FDC규제과학회는 물품에 덧붙여 법률과 제도를 다룰 수 있게 된다. 다학제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때문에 학회 구성원들이 산학연으로 풍부해지는 것은 물론 커버 주제가 넓어진다. 마이크로바이옴을 예로 들면 이를 기반으로 의약품도, 건기식도 만들 수 있다. 개발과정에서 의약품일 때의 주의사항과 건기식에서의 주의사항, 숙지해야 하는 규제 등이 다를 수 있지만 본 학회에서는 이를 다양한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토의할 수 있다.
▲규제과학에 대한 관심 및 노출 빈도가 증가하고 있다. 규제과학에 관심을 갖거나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기존에는 심사 체계가 효율성을 위해 의약품, 의료기기와 같이 이원화된 틀로 나뉘어 있었다. 문제는 이와같은 체계가 융복합 기기가 출현하는 현 시점에는 오히려 신기술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하거나 더디게 하는 원인으로 지목된다는 점이다.
환자에게 유익하다면 업체들은 새로운 기술을 묶어 융복합 기기를 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럴 때 어떤 규제를 적용해야 효과적이고, 이런 신기술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지 고민이 필요하다. 기존의 규제 시스템은 이런 신기술 제품들을 다 품을 수 없다. mRNA 방식의 코로나19 백신이 세상에 나올 것이라는 걸 불과 1~2년 전만해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이런 혁신 제품을 받아들이려면 유익성, 위험성을 평가할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 규제과학이란 궁극적으로는 혁신 제품을 빠르게 환자에게 제공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이미 해외에서도 규제과학은 2006년부터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2006년 미국에선 새로운 약이 계속 개발되는데 허가는 안 되고 정체기에 접어든 시절이 있었다. 당시 에센바흐 FDA 청장은 세상이 필요로 하는 만큼 FDA가 준비가 돼 있는지 모니터링을 요청해 IT 기술 발달 및 줄기세포 신기술 등에 대응하기에 뒤쳐져 있다는 신랄한 보고를 받은 바 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규제는 늘 한발 뒤쳐진다.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평가할 역량을 키우는 건 규제당국만의 몫이 아니다. 오히려 연구소, 학계, 사회 모든 분야가 골고루 규제과학을 연구 주제로 삼아야 한다. 제3자의 입장이 객관적이고 공정할 수 있다. 규제당국은 보수적이기 때문에 다소 느리지만 학회는 최신 지견의 교류의 장이고 다양한 논의가 오가기 때문에 빠른 대응이 가능하다. 규제과학을 연구하고 대안을 규제당국에 제시하는 역할, 그리고 산업계와 당국의 가교 역할을 하는 데 본 학회의 존재 의의가 있다.
▲이번 추계학술대회부터 규제과학이 주제로 전면 등장하는지?
추계학술대회는 오는 11월 12일에 개최된다. 명칭 변경 후 첫 학술대회이니 만큼 변화된 양상을 단적으로 보이기 위해 규제과학을 전면에 내세웠다. 학술대회를 보면 본 학회가 추구하는 방향, 주제를 단번에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는 바이오헬스 혁신을 위한 규제과학의 역할과 과제(가제)로 잡았다. 명칭 변경에 따른 기대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기대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