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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억 예산 어디 갔나" 의료기기 실증사업 한계론 대두

발행날짜: 2022-02-14 05:30:00

범부처 전주기 사업단 필두 각 부처별 지원제도 마련 봇물
수많은 서류 작업에 기업들 녹다운…의학회도 이탈 조짐

4차 산업 혁명으로 의료산업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정부가 실증 등 다양한 지원사업을 내놓고 있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이어지며 한계론이 대두되고 있다.

대부분이 연구 과제 형식으로 단기 프로젝트에 불과한데다 지원에 비해 수많은 서류 작업 등에 시달린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는 것. 이로 인해 기업들은 물론 학회들의 이탈 기류도 감지되는 분위기다.

정부 주도 의료기기 실증사업 봇물…관련 예산 폭발적 증가

13일 의료산업계에 따르면 각 정부 부처와 기관들이 마련한 의료기기 실증사업들이 실제 기업들의 수요와 엇박자를 내면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4차 산업 혁명을 타고 정부 주도의 의료기기 실증 등 지원사업이 급증하고 있다.

정부 실증사업에 참여중인 A기업 임원은 "너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돌아온건 수많은 서류뭉치들 뿐"이라며 "정작 필요한 부분보다는 보고서를 위한 보고서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정부는 4차 산업 혁명과 코로나 대유행으로 촉발된 의료산업 붐에 맞춰 다양한 방식의 실증 등 지원사업을 마련하며 산업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11일 발표한 지방자치단체 공모형 국산 의료기기 경쟁력 강화 사업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복지부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디지털 헬스케어 의료기기 실증 지원사업 체계를 마련하고 인공지능 등 새로운 기술과 융합한 디지털 헬스케어 제품을 실증할 예정이다.

총 5년간 200억원을 들여 디지털 헬스케어 제품의 임상적 안전성과 유효성을 정부와 지자체가 직접 지원하는 것이 골자.

또한 나아가 진단 보조 소프트웨어에 대한 유효성 평가 모델 개발에·대한 실증도 진행하며 최근 주목받고 있는 치매와 우울증 등 정신건강 분야 디지털 치료기 임상 실증을 위한 인프라 구축도 지원할 계획이다.

보건복지부 이형훈 보건산업정책국장은 "이번 신규사업을 통해 의료기기 산업을 한 단계 더 도약시키고 미래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며 "또한 앞으로도 연구 개발과 임상·실증, 국내외 시장진출까지 전 주기적 지원으로 의료기기산업을 적극 육성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업은 비단 복지부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산업통상자원부부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까지 다양한 정부 부처들이 의료기기 산업 육성을 외치며 다양한 사업들을 줄줄이 쏟아내고 있다.

복지부 등 5개 정부 부처가 구성한 범부처 전주기 의료기기 연구개발 사업단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 사업은 무려 1조 2천억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예산이 투입되는 범 국가적 프로젝트.

사업단을 주축으로 총 9가지 의료기기 통합 플랫폼을 구축하고 범 정부적 지원을 통해 한국형 의료기기 개발과 실증, 상용화를 돕는 것이 골자다.

이를 기반으로 이미 각 카테고리별로 200개가 넘는 세부 사업들이 이미 진행중인 상황. 2020년부터 2025년까지 진행되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이미 반환점을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부처별 사업들도 활발이 이뤄지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국산 의료기기에 대한 사용자 경험 축적을 목표로 국산 의료기기 활성화 지원 사업을 진행중이다.

또한 중소벤처기업부는 비대면 의료기기 스타트업 지원에 600억원의 예산을 편성해 사업을 추진중에 있으며 한국의료기기안전정보원도 차세대 의료기기 전주기 지원사업에 들어갔다.

이외 복지부도 국산 의료기기 사용자 평가 지원사업을 통해 31개 과제에 30억원의 예산을 투입중이며 보건산업진흥원도 마찬가지 사업을 통해 기업별 2억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의료기기 기업 수요와 엇박자…"선택과 집중 필요"

이처럼 적게는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수조원에 이르기까지 의료기기 산업 육성을 위한 수많은 지원사업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실제 기업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기업들이 현장에서 요구하는 수요와 정부 지원 사업이 엇박자를 내면서 기업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기업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수요와 정부의 지원 사업이 엇박자를 내고 있는 셈. 가장 많은 지적을 받는 부분은 바로 실효성에 대한 부분이다.

지난해 지원사업 십여개를 수행한 B기업 임원은 "사실 이러한 지원사업들이 산업계가 꼭 바라던 일이었던 것은 맞다"며 "하지만 각 정부 부처들이 앞다퉈 준비 안된 사업들을 쏟아내고 있는데다 말 그대로 '공무원' 마인드가 결합되면서 실상은 엉망진창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실제 실증 등 기업에 필요한 사업을 추진하기 보다는 이 사업을 따기 위한 PT 준비나 사업을 이어가기 위한 보고서에 더욱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말 그대로 페이퍼 워크(서류작업)에 빠져 정작 중요한 부분은 손도 못댄 채 사업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덧붙였다.

정부 부처간 경쟁으로 인해 사업의 연속성이 없다는 지적도 많다. 부처별로 실적을 내려하다보니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사업에만 예산이 치중되고 있는데다 이마저도 중복 사업들이 많다는 것.

이로 인해 일부 기업들은 독보적 기술 개발 등 보다는 사실상 정부 예산만 확보하는데 주력하며 산업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A기업 임원은 "그럴싸한 PT 몇장과 얼굴 마담격인 임원들을 앞세워 정부 과제나 사업들만 쏙쏙 빼먹는 기업들이 사방에 깔려있다"며 "수십억원에 달하는 정부 예산만 줄줄이 따놓고 돌려막기를 하는 경우로 이러한 기업들로 인해 정작 기술력을 가지고 있지만 포장에 능하지 못한 알짜 기업들이 소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귀띔했다.

이어 그는 "정부가 인공지능이나 메타버스, 디지털 트윈 등 급부상하는 키워드에만 예산을 집중하다보니 이를 교묘하게 결합해 가며 예산만 탕진하는 경우"라며 "정부 부처들마다 경쟁적으로 실적을 내려다보니 정작 사업을 수행하는 기업에 대한 검증 등에는 소홀한 경향이 많다"고 비판했다.

그러다보니 아예 이러한 사업 자체를 포기하거나 외면하는 기업들도 생겨나는 추세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판에서 벗어나 차라리 자체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판단을 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는 것.

스타트업 중 성공 케이스로 꼽히는 C사가 대표적인 경우다. C사는 지난해까지 진행하던 정부 사업들을 모두 반납하고 올해부터 아예 이를 수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C사 대표이사는 "이제 실증사업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난다"며 "수많은 과제들을 수행했고 수많은 사업에 참여했지만 정작 남은 것은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서들 뿐"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정부 예산을 따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우리가 정말 해야할 일에 집중하자는 취지에서 더이상 실증사업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며 "차라리 그 리소스와 인프라로 우리가 잘하는 분야에 매진하다는 취지"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전문가들은 단기적 프로젝트에 매몰되지 말고 실제 국내 기업들이 상용화를 넘어 수출까지 이어갈 수 있는 부분에 집중 투자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너무나 아까운 정부 예산이 부처간 경쟁으로 인해 소모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기라는 지적이다.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유철욱 회장은 "각 정부 부처들이 경쟁적으로 사업 모델을 만들고 지원 체계를 짜다보니 이제는 기업들도 나아가 협회도 어디서 어떤 과제들이 시행되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라며 "실제로 혁신적 제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전시적 지원책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그는 "정말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술력을 가지고 있지만 실증과 상용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에 수십억원이 됐든 수백억원이 됐든 집중적으로 투자해 마중물을 부어야 한다"며 "이러한 기업들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해야 국내 산업 전체를 견인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최대 지원군 의학회도 이탈 위기 "사업 의미 퇴색됐다"

이는 비단 기업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소모적인 사업 구조가 지속되다보니 국내 의료기기 산업 부흥이라는 취지에 맞춰 기꺼이 발을 담근 지원군들도 속속 철수를 준비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혁신 의료기기 검증과 자문 등을 자처하던 의학회도 이같은 문제점에 공감하고 있다.

범부처 사업단 등에서 의료기기 실증 및 자문 역할을 맡으며 큰 축을 담당하고 있던 대한의학회가 대표적인 경우다.

대한의학회는 의학자들이 산업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취지로 다양한 정부 사업과 사업단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며 팔을 걷어 붙인 바 있다.

현재 가장 큰 규모의 프로젝트인 범부처 의료기기 사업단에서 별도의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해 혁신 의료기기 검증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의학회는 산하학회 100여곳에서 전문가들을 추천받아 기업들과 1대 1로 매칭하며 연구 단계부터 의학적 타당성을 검증하는 체계를 마련했다.

또한 이를 위한 임상 전문가 자문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물론 지난해 조직 개편을 통해 혁신의료기술위원회를 새롭게 구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것도 사실이다.

과거 의학에만 몰두했던 관행을 버리고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향후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차세대 산업 육성에 사회적 기여를 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대한의학회 이진우 부회장(혁신의료기술위원장)은 "그 어떤 혁신 의료기기 기술도 결국 의사의 검증과 신뢰를 통해서만 비로서 빛을 발할 수 있다"며 "혁신 의료기기가 차세대 먹거리로 대두되고 있는 만큼 개발 단계부터 의학 전문가 단체로서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의학회의 의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과거와 같이 개발이 끝난 기기에 대해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하던데서 벗어나 개발 단계부터 의학자들이 함께 한다면 분명 조금 더 효율적으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제품을 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러한 취지에서 의지를 불태웠던 의학회도 앞서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지쳐가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기업들의 토로와 지적이 지원군인 의학회에도 똑같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셈.

이로 인해 의학회가 자문을 자처한 각 사업 등에서도 곳곳에서 파열음이 나면서 사실상 원점으로 돌아갈 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대한의학회 임원은 "산업 분야에 대한 목소리를 자제하던 의학회가 지금과 같이 의료기기 검증과 자문에 나선 것은 전문가 단체로서 사회적 역할을 해야한다는 책무가 가장 컸다"며 "하지만 1년여 동안 다양한 사업을 진행한 결과 회의적 시각이 가득하다"고 털어놨다.

그렇다면 그 어느때보다 자문과 검증에 적극적이었던 의학회가 이처럼 회의적으로 돌아선 이유는 뭘까.

일단 앞서 기업들이 지적한 문제들이 크다. 단기적인 사업들이 이어지고 있는데다 이에 대한 의학회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임원은 "바라는 목표와 지향점, 관련 기술들은 첨단을 달려가고 있는데 이를 추진하는 정부와 기관들의 시스템은 20세기 방식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며 "말로만 4차 산업을 얘기하지 일을 추진하는 방식들은 과거 관료주의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대한민국 최고 권위의 학술단체를 마치 용역회사 부리듯 감시하고 관리하면서 자기들 입맛대로 이러저리 휘두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자문과 용역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 의학회가 이러한 처우를 받아가면서 이 일을 지속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들이 지배적인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에 따라 의학회는 이같은 의견들을 각 부처 및 범부처 의료기기 사업단 등에 전달하고 개선을 요구할 계획이다.

또한 만약 지금과 같은 구조와 체계가 지속된다면 의학회 내부의 합의를 거쳐 전면적으로 이를 중단하는 방안까지 검토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의학회 임원은 "대한의학회가 무슨 돈과 예산을 바라고 이러한 자문과 검증을 자처했겠느냐"며 " 권위있는 학자와 학회들이 PPT까지 만들어가면서 마치 연구비를 따내는 것 같은 지금과 같은 구조가 지속된다면 우리가 이러한 자문과 검증 역할을 해야할 이유 자체가 없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이에 대한 분명한 의견을 정리해서 전달할 계획이며 자문과 용역은 엄연히 다른 것임을 분명하게 선을 그을 예정"이라며 "지금과 같은 관료주의적 방침과 체계를 유지하겠다면 의학회는 미련없이 중단할 의지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