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형식에 얽매이는 것도 싫다. 칼럼을 부탁 받고 주제를 고민하다 소소한 나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려 한다. 두서가 없어도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나는 32살의 대학병원에서 수련중인 전공의이다. 또한 대한 전공의협의회에서 홍보이사직을 맡고 있다. 물론 대한민국의 아주 평범한 30대 초반의 성인 남성이다.
32살의 나이, 어리다면 어리고 많다면 많은 나이다.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날 나이고, 슬슬 가정을 꾸릴 나이도 되었다.
무엇보다 슬픈 것은 도전보다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하는 나이라는 것이다.
나의 꿈은 여행이다. 어릴적부터 혼자서 수많은 나라들을 다녔다. 파리의 에펠탑을 보며 설렜던 25살의 어느날.
스물 일곱살의 어느 날,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좋아서 무작정 대만을 방문했다. 폭우가 쏟아지던 대만 지우펀에서 예쁜 셀카 한장 남겨 보겠다고 물에 빠진 생쥐가 되었던 그 날.
스물 여덟살의 어느 날, 페이스북에서 본 어느 한 영상이 마음을 적셔서 떠난 러시아. 그리고 무작정 올라탔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 말도 안통하고 시베리아 벌판에서 전파도 통하지 않아 러시아, 몽골 사람들과 오붓이 둘러앉아 필담을 나누던 그 날.
나의 20대는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다녔다. 수많은 자격증들이 나의 젊은 날의 호기심을 반증하고 있다. 하지만 30대가 지난 지금, 호기심이 과거에 비해 많이 사라졌고, 도전을 점차 꺼리게 되어간다.
의사라는 직업을 하며 환자를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본분이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주변 의대생, 의사들을 보면 너무나 좁은 세상에 갇혀 살고 있는 느낌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병원이라는 틀 안에서 쳇바퀴 돌아가듯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사실 의사라는 직업이 현실에 안주하기 쉬운 것은 사실이다. 공부를 잘해 의대를 들어와 의대 6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이후 페이닥터나 대학병원에 남는 정해진 삶을 살다보니 현실에 안주하기 쉽다.
나의 친구 중에 의대를 졸업 후 (심지어 성적도 좋았다) 벤처 기업을 설립하려는 친구가 있었다. 처음엔 의아했지만, 똑똑한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친구의 길을 응원해 주었다. 아직은 신생 회사지만 투자도 많이 받고, 타 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온다고 한다.
나 또한 꿈이 원래 물리학자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의대에 가게 되었다. 남들이 다 가는 정해진 길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었다.
IMF 이후 의대 입결(입시결과의 줄임말)은 사상 최고를 찍었고, 우리나라의 대부분 머리 좋은 인재들은 의사가 되었다. 의사라는 직업이 똑똑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천재들이 해야만 하는 직업은 아니다.
의대 공부를 해보면 방대한 양을 순간 암기를 잘하는 친구들은 좋은 성적을 받고, 반대로 고등학생 때까지 수학/물리 올림피아드 한국 국가대표로 나가던 친구들은 유급을 하는 경우를 몇몇 봤다. 의대공부는 번뜩이는 천재들의 아이디어가 필요한 공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서두가 길었다.
항상 현실에 안주하는 매너리즘에 빠진다. 매너리즘에 빠지면 고인물이 되어 썩게 된다. 삶에 항상 새로운 자극을 찾아보자.
동해에서 잡힌 오징어는 성질이 더러워 한시간 안에 사망한다고 한다. 서울까지 옮기는데 3~4시간이 걸리는데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천적을 해수통에 같이 넣어주는 것이었다.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살다보면 삶이 무기력해 진다.
난 오늘도 새로운 자극을 찾으려 노력한다. 비록 내가 성질이 더러운 오징어는 아니지만 병원업무와 집만 반복하는 삶을 살다보면 시야도 좁아지고, 삶의 활기도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 요즘도 매일 운동을 하고 새로운 공부를 하려고 한다. 이러한 취미생활이 오히려 근무시간 동안 능률을 올리고 본업에 집중하게 만든다.
나는 대한민국 1% 의사들이 아직도 너무 정해진 길에 안주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물론 여기에 나도 포함된다.)
사실 공부를 잘해서 의대를 들어왔고, 정해진 길을 따라 가면 안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다. 사실 누가 들으면 배부른 고민이라 생각하겠지만, 좋은 머리를 가지고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힘써 줄 수 있는 의사가 나오기를 바라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아주 어릴 적 초등학교 중학생 시절 학원에서 만나 서로 꿈을 이야기하면 '노벨 물리학상이요' '필즈상을 받을 거에요'라고 말하던 천재 같던 친구들은 대부분 의사가 되었고, 나이가 들어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모두가 병원일에 지쳐 어두운 낯빛으로 '내가 그런말을 한 적이 있었나?' '그건 천재들이나 하는 거지'라는 이야기로 과거의 꿈들을 부정하고 있다. (물론 나도 이건 1000% 이해하는 바다. 밤샘 당직을 하다보면 꿈이 웬말이냐)
이러한 내면적 근거에는 안정적인 루트가 가장 큰 근거가 되겠지만 의사가 되기까지 어디가서 항상 인정받고, 큰 실패를 겪어 보지 못했기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많고 도전의식이 부족한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난 의사들도 사회 활동이 조금 더 많아지고, 정해진 길이 아닌 조금 다른 샛길로도 좀 나가 보았으면 좋겠다. 똑똑한 머리를 너무 썩히고 있어 아깝다는 생각도 했다.
병원 내에서만 갇혀있지 말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활동도 하는 그러한 의사들이 점차 많아졌으면 한다. 물론 나부터 그러한 삶을 사려고 노력하겠다.
30대 중반이 되어가는 지금, 새로운 도전이 망설여 지는 지금, 한 명언으로 스스로에게 당부하고 싶다.
누구에게나 청춘이 지나가 버렸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실제로는 그것이 훨씬 뒤의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미니언 먹로클린)
도전하는 삶을 살자. 나의 청춘은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