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관의 한해 살림살이를 결정하는 '수가협상'이 도통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추가투입재정(밴딩, banding)의 규모가 공개되지 않으면서 남아있는 단 하루의 협상에서 주요 변수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수가협상 일정은 이제 하루만 남아있어 공급자 단체 사이 눈치싸움은 더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건강보험공단은 25일 대한치과의사협회를 시작으로 27일까지 공급자 단체와 순차적으로 2차 수가협상을 끝냈다. 이제 5월의 마지막 날 최종 협상 과정만이 남았다
통상 2차 협상에서 건보공단은 재정운영위원회 소위원회(이하 재정소위)가 정한 1차 밴딩을 공급자 단체 쪽에 제시한다. 공급자 단체는 이를 바탕으로 추후 협상에서의 전략을 짠다.
문제는 1차 밴딩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 재정소위는 2차 협상에 앞서 지난 23일 2차 회의를 열었지만 의견차가 워낙 커 밴딩을 정하지 못했다. 이에 25일 오후 소위원회 안에서도 일부 위원이 모여 다시 회의를 해 어느 정도 의견 일치를 이끌어 냈지만 공식적인 회의가 아니었기에 확정을 짓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대략적인 밴딩은 설정됐지만 공식 인준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건보공단 수가협상단 입장에서는 선뜻 공급자 단체에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
지난해 수가협상에서는 1차 밴딩으로 8000억원대가 설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협상에서 공급자 단체는 1차 밴딩을 듣고 마지막 날 협상에서 밴딩 규모 및 인상률 확대를 놓고 건보공단, 재정위와 밀고 당기기 '협상'을 진행, 최종 1조666억원의 재정 투입이 결정됐다.
관례적인 절차가 올해는 되지 않다 보니 2차 협상도 공급자 단체의 수가 인상 당위성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자리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건보공단 협상단은 가입자 단체가 과거 보다 호의적이지 않고 희망적이지 않다는 부정적 분위기만 전달했다.
결국 올해 수가협상에서는 오는 31일 협상 마지막 날이 돼서야 구체적인 수치를 주고받게 된 셈이다.
공급자 단체 "협상 타결 가능성 암울" 호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급자 단체의 비판은 가입자를 향했다. 공급자 단체는 지난해보다는 밴딩이 확장돼야 한다는 입장이며 대한의사협회는 2조~3조원은 돼야 한다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언급하고 있다.
가장 먼저 수치 없는 2차 협상을 치르고 나왔던 치협은 "협상을 위한 기본적인 배경조차 마련되지 않아 안타깝다"며 협상 방식과 절차에 문제를 제기했다.
대한한의사협회 수가협상단장인 이진호 부회장은 2차 협상 후 "허탈하다"라고 탄식했다. 이 부회장은 올해로 네 번째 수가협상에 참여하고 있는데 "1차 밴딩을 안 준 적은 처음"이라며 "올해가 (협상) 타결 가능성에 가장 암울한 느낌"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한의과 유형을 대표해서 협상을 하고 있는 만큼 전체 밴딩이 나와야 회원을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도 하고 전략도 세우는데 한 달 동안 협장 자체가 제대로 안되고 있는 것"이라며 "두려운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마찬가지로 올해 네 번째 수가협상에 참여하는 대한병원협회 수가협상단장 송재찬 상근부회장 역시 처음 겪는 상황이라며 "건보공단 협상단 입장을 들었을 때는 밴딩을 기대하기 난망하다"라며 "가입자 단체는 질 좋은 서비스를 받는 게 중요하다는 인식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건보공단 협상단은 밴딩 수치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줬고, 가입자도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며 "물가인상, 최저 임금 인상을 감안하면 최소한 지난해보다는 (밴딩 규모가) 확장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수가인상에 투입하는 재정에 대한 가입자의 인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
대한약사회 박영달 수가협상단장은 보다 구체인 수치를 내밀면서 가입자 단체의 인식 변화를 촉구했다.
박 단장은 "밴딩을 전혀 제시받지 못했다. 건보공단 협상단이 가입자를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 건지, 가임자가 오만한 건지 모르겠다"라며 "이런 형태로 협상을 이끌어가서는 안된다"라고 일침 했다.
또 "지난해 지방정부 지원금을 빼고도 소상공인에게 지급된 재난지원금은 35조7000억원에 달하고 2차 추경으로도 24조5000억원이 편성됐다. 계산해보면 소상공인 1인당 2000만원 정도의 손실보상금이 돌아갔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요양기관이 전국에 10만개 정도 되는데 1000만원씩만 지급한다고 해도 1조원이다"라며 "자영업자에게 60조원이 나갔는데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에서 헌신한 보건의료계에 1조원 정도 더 쓰는 것이 가입자에게 그렇게 배가 아픈 일인가. (가입자 단체는) 전향적으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호소했다.
"손실보상, 수가협상 반영 안 된다" 주장 견지
가입자 단체 주장처럼 코로나19 대유행 속에서 의료기관에 지급됐던 손실보상을 건강보험 수가 인상에 갖고 와서는 안된다는 입장도 견지했다.
이 부회장은 "코로나로 전 국민이 위기 상황에 놓였고, 손실보상은 전 국민에게 돌아갔다"라며 "그런 상황에서 한의계는 손실보상에서조차 제로에 수렴한다. 그럼에도 협상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니 허탈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송 부회장도 "추가 투입 재정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건강보험 요양급여비 관련 협상에서 다른 부분의 얘기를 갖고 와 이야기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어 "가입자 측은 보험료 인상의 부담을 이야기하면서 밴딩을 많이 주기 힘들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적은 보험료로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국가"라며 "전체적인 의료서비스 향상을 보고 고민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의료진은 감염병 대유행 상황에서 수입 문제를 차치하고 감염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 상황에서 타인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고 했다.
대한의사협회 수가협상단장인 김동석 대한개원의협의회장은 "오미크론 창궐 후 의료진의 감염이나 사망도 굉장히 높았다"라며 "의사들은 목숨을 걸고 코로나 최전선에서 진료 활동을 했는데 말로만 덕분에 챌린지지 손실보상 등을 수가협상에 연결시키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