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찾기는 진정성과 합리성 회복에서부터
임진년(壬辰年)의 새 해가 밝았습니다. 누구나 새 해는 새 희망을 찾게 마련입니다만, 의료계에는 새 해의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이 지금 의료계가 처한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그 어느 해인들 암울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새 해를 맞으면 가슴에 희망을 품게 마련입니다. 바다 밑에서 불덩이가 솟구치듯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 까닭 모를 기대와 희망이 돋아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유독 그런 의례적인 희망조차도 부질없이 느껴지는 게 의료계의 현실입니다.
그건 국가통제체제로 인한 척박한 의료 환경을 개선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갈수록 악화되는 오늘의 현실이 구조적인 요인 외에도 우리 의료계 내부요인에서 비롯된 측면이 없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인 대화를 통한 소통은 없고 일방적인 주장만 있는 게 우리 의료계의 적나라한 현주소임은 회원 모두가 익히 아는 그대로입니다. 지난해 12월10일 있었던 임시대의원총회에서의 폭력사태는 그 결정판이라 할 만합니다.
이 모든 게 제 부덕함의 소치임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의료계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혔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온 국민에게 우리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였다는 점에서, 또 그로 인하여 의료계가 스스로 고립의 길로 한 걸음 더 들어섰다는 점에서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판보다 더 정치판 같은 의료계의 이 안타까운 현실을 바로잡지 않고는 제도개선은커녕 의료계의 앞날은 날이 갈수록 더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임기 동안은 물론 임기 이후에도 의료계 내부가 진정성과 합리성을 회복하는 데 진력할 것입니다.
새해 벽두부터 가슴을 무겁게 하는 말씀을 드려 송구합니다만, 이 역시 의료계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그릇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가 희망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료계의 희망 찾기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현실의 벽이 높다 하더라도 희망은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료계가 희망을 갖지 못한다면 국민건강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국민건강을 포기한다면 의사는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희망은 있습니다. 주지하듯 조만간 직장조합과 지역조합을 통합한 국민건강보험법 헌법소원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만일 위헌결정이나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온다면 희망을 꿈 꿀 수 있을 것입니다. 위헌결정을 거대공룡 공단으로 상징되는 강고한 국가통제체제의 완화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위헌 결정이 난다 해도 정부는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단순히 재정의 분리운영만으로 모면하려 할 공산이 아주 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어떻게든 여기서 실마리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희망을 찾기 위한 또 한 가지 길은 이른바 의약분업의 개선입니다. 그간 의료계가 의약분업 개선을 줄기차게 외쳐왔지만 반향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올 것입니다. 노령인구의 급속한 증가와 함께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약제비로 인하여 건강보험재정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지하듯 의약분업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제도입니다. 정부는 건강보험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비용․효과적인 처방을 강제하고 있지만 의약분업을 개선하지 않고는 연목구어일 뿐입니다. 국민에게 이를 적극 알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국민의 요구에 의해 의약분업이라는 허울만 좋은 비효율적인 제도를 개선토록 해야만 합니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임기 끝까지 의료 환경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회원들과의 더 많은 소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새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11. 12. 26.
대한의사협회 회장 경만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