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질환관리제를 이용해 얼마되지도 않는 인센티브를 받겠다는 게 아니다. 다만 환자들이 요구하기 때문에 무작정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A개원의의 하소연이다. 그는 환자들의 요구에 따라 만성질환관리제 등록을 해주고 있다.
만성질환관리제가 시행된 지 20여일이 지났다. 새로 들어설 의협 집행부를 비롯해 의료계에서는 거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현장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고혈압, 당뇨병 환자들을 주로 진료하는 내과계 동네의원 상당수가 만성질환관리제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메디칼타임즈가 최근 전국의 내과, 가정의학과 의원 51곳에 전화를 걸어 환자 등록을 받는지 여부를 문의한 결과 36곳에서 제도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 과의 경우 의료계 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내과계 대부분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치로 보자면 불참 비율이 높지만, 사실상 제도가 운용되고 있는 것이다.
개원의들은 만성질환관리제 불참 명분과 현실적 문제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의료계 전체의 뜻을 따라 거부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정부와 싸우는 게 아니라 환자를 상대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큰 부담이라는 반응이다.
내과개원의사회 한 지회장은 "환자에게 만성질환관리제의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하고 설득한다. 또 문제가 있다는 점도 공감한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끝까지 요구하면 거부하기는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다른 개원의는 "환자가 TV를 보고와서 만성질환 등록해 달라고 요구하는데, 어떤 의사가 거부하겠느냐"면서 "자칫 '국민을 볼모'로 잡는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고 강변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겠지만 환자가 요구하면 이를 거부하기는 어려다는 게 내과계의 정서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내과계 개원의들은 내과계가 의료계 전체 뜻과 무관하게 슬그머니 제도에 참여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의사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변절자'라는 원색적인 비난도 쏟아지고 있다.
이에 대해 내과계에서는 볼멘 소리도 터져나온다. 고혈압, 당뇨병과 같은 만성질환 관리는 내과계가 담당해야 할 영역인데, 타 과에서 지나치게 특정 입장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내과개원의사회 관계자는 "우리 내부에서는 만성질환관리제에 대해 여전히 찬반 의견이 엇갈리고, 한쪽으로 쏠린 적도 없다"면서 "타과에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비난하는 건 지나치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성질환관리제는 이미 단순히 참여냐 거부냐의 문제를 넘어서고 있다. 의료계 정치와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곧 출범할 제37대 노환규 집행부는 만성질환관리제 거부를 내걸고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만성질환관리제에 대해 선명한 반대를 하고 나선만큼 공약 이행을 위해 이를 저지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도 안고 있는 것이다.
의협 출범준비위원회는 복지부에 ▲지역 보건소의 진료기능 삭제 위한 법령 개정 ▲저가 중심의 관치의료 강요행위 중단 ▲선 진료수가 현실화, 후 지불제도 개편 논의를 전제로 만성질환관리제 전면 재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노 당선자 측은 또 한편으로는 의료계에 전면 거부를 독려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원의들이 만성질환관리제에 참여해 버리면 의협 집행부는 지도력과 대정부 협상력 모두에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노환규 당선자 측은 "현재 참여율은 극히 저조하다. 극히 일부 내과계 회원들만 동참하고 있다"고 애써 참여분위기를 외면하는 모양새다. 만성질환 관리제를 두고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떤식으로든 현실적인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 의료계 인사는 "노 당선자가 만성질환관리제 시행 직전에 회장에 당선됨에 따라 정치력을 갖고 의료계를 설득해 대응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고 환기시켰다.
이어 그는 "따라서 현실적인 대안을 갖고 이 사태를 빠르게 수습할 수 있느냐가 새 의협 집행부의 첫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