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스티브잡스가 아이폰을 들고 나왔을 때 전세계가 들썩였다. 일각에선 '기존 휴대폰보다 5년 앞선 혁신적이고 마법같은 제품'이라고 평했다.
당시 스티브잡스는 "아이폰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기술로 탄생한 것이 아니다. 다만 각각의 서비스를 아이폰이라는 휴대폰에서 통합하면 어떨까하는 발상의 전환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분당 서울대병원이 지난 4월 도입한 '차세대 병원정보시스템'은 그런 점에서 아이폰을 많이 닮았다.
기존 의료진 중심의 시스템을 철저하게 환자중심으로 바꾼 것이 그렇고, 산발적으로 퍼져있던 의료정보를 한곳에 보기 쉽게 구현한 점이 그렇다.
'의료 소비자' 중심의 한발 앞선 병원정보시스템
최근 '메디칼타임즈'가 현장 취재한 분당서울대병원의 차세대 병원정보시스템은 아이폰을 처음 접했을 때만큼 새롭고 신기했다.
기존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발상의 전환이 놀라웠다.
모든 의료진이 사용하는 전자차트에서부터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분당서울대병원은 이미 EMR시스템을 통해 의료정보의 전산화를 도입한 상태. 하지만 차세대 EMR은 의료진에게 환자의 정보를 한눈에 제공하도록 했다.
가령, 내과, 정형외과, 신경과를 동시에 다니는 A환자가 있다고 치자. 지금까지의 EMR은 내과에서 이 환자의 진료기록 등 타과의 진료기록을 보려면 일일이 정보를 검색하고 찾아야 가능했다.
3분 진료가 현실인 외래진료에서 이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차세대 EMR은 A환자가 10년전 분당서울대병원에 처음 어떤 질환으로 내원했는지부터 어떤 의료진에게 진료를 받았는지, 당시 어떤 수술을 했는지 혹은 어떤 검사를 했는지 그 결과까지 모든 정보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차세대 EMR시스템은 A환자의 차트를 클릭하는 순간, 이 모든 정보를 이미지로 펼쳐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CT, MRI검사 결과도 1초만에 보여준다.
적어도 5분이상 환자와 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1초만에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또 모든 의료진의 스마트 폰에는 모바일 EMR를 탑재해 해외학회 중에도 치료 중이던 환자가 응급실에 올 경우 검사결과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신속하게 치료결정을 내려 현지 의료진이 치료할 수 있도록 한다.
차세대 병원정보시스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얼마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인 공모전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red dot design award)'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Best of best상을 수상한 '스마트 베드'도 입원환자의 편의성을 크게 높였다.
입원실 TV는 공용이기 때문에 채널선택이 불편하고 시트를 교체하거나 식사메뉴를 변경하는 등 요구사항이 있을 때마다 병동에 나가서 직접 말해야했다.
하지만 '스마트베트'는 침대에 달린 모니터를 통해 TV시청부터 인터넷 검색, 간단한 요구사항들을 수시로 전달할 수 있게 됐다.
분당서울대병원은 이 시스템을 개발하기 전에 전직원에게 아이디어를 수집했으며 2년에 걸쳐 하나하나 현실화했다. 여기에 쏟아부는 예산은 400억원. 게다가 이를 유지하는 데 드는 예산만도 연 100억원에 달한다.
대신 전산화를 통해 의무기록사 등 인력을 최소화하면서 인건비는 줄이고, 업무 효율성은 높아졌다.
특히 이 시스템이 놀라운 것은 환자에게 의료진이 가진 정보를 모두 공개하고 공유한다는 점이었다.
환자의 진료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이미 다수의 의료기관에서 시도하고 있는 시스템. 당뇨관리 앱이나 혈압관리 앱을 통해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수시로 체크하도록 한다.
차세대 병원정보시스템은 한발 더 나아가 그동안 자신이 어떤 검사를 받았으며 의료진은 누구였는지, 어떤 약을 처방해서 현재 복용중인 약은 무엇인지 등 자신이 병원에서 진료받은 모든 정보를 수시로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환자도 자신을 진료하는 의사만큼이나 자신에 대한 정보를 가질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차세대 병원시스템의 딜레마…결론은 '파괴적 창조'
여기에 빠른 변화 속 딜레마가 존재한다.
환자를 위해 의료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좋지만, 이는 의료진 입장에선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뇨환자 B씨가 당화혈색소 검사를 받았다고 하자. 의료진은 정상수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문제가 안된다고 판단해 환자에게 고지하지 않을 수 있다.
지금까지의 시스템에선 환자도 으레 '괜찮겠거니' 생각하겠지만 차세대 병원정보시스템을 통해 수시로 자신의 검사 결과를 확인할 수 있게 된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일부 환자 중에는 '왜 정상수치가 아닌데 고지를 하지 않았느냐'면서 민원을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있다.
결과적으로 의료진과 대등한 정보력을 갖게된 환자는 의사에게 보다 상세한 설명을 요구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 의사는 그만큼 환자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을 해야만 하는 의무가 커진 셈이다.
환자입장에선 최상의 조건이지만 의료진 입장에선 반갑지 못한 상황일 수도 있다.
한 의료진에게 이 같은 변화가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한마디로 딜레마를 해소했다.
"이미 의료는 비즈니스적인 산업으로 발전했으며 생존하기 위해선 일종의 '파괴적 혁신'이 필요하고, 차세대 병원정보시스템은 바로 그 일환이라고 본다."
의사 입장에선 다소 불편해지고 부담스러운 상황에 직면했지만 이미 의료현실이 의사들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시장을 선도하려면 앞서 실행하는 편이 낫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미래의 의료 '표준화된 의료의 현실화'
그렇다면 분당서울대병원이 보여줄 미래의 의료는 어떤 모습일까.
분당서울대병원 의료정보센터 이기혁 교수(가정의학과)는 표준화된 의료를 현실화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분당서울대병원은 차세대 병원정보시스템 도입 이후 일반 병동에서 심폐소생술을 단 한건도 실시하지 않았다.
환자가 조금만 이상징후를 보이면 시스템이 가동, 즉각적으로 반응해 사전에 예방조치를 하도록 한 결과다.
이 교수는 "이 시스템의 핵심은 의사와 환자의 정보격차를 줄인 것"이라면서 "이를 통해 환자중심의 진료가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이는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수출할 계획을 갖고 있으며 실제로 이미 2~3개국 병원과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스티브잡스의 아이폰이 그랬듯 조만간 분당서울대병원의 차세대병원정보시스템을 벤치마킹하는 수많은 시스템이 개발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