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비스킷 통이라고 생각하면 돼. 비스킷 통에 여러 가지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는데,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만 자꾸 먹어버리면, 나중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거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라고."
어디서많이본듯한이야기일겁니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이걸 읽고 깨달은 건 아직 저는 맛없는 비스킷을 먹을 날이 많이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병원실습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된 지금 먹고 있는 비스킷이 제가 살면서 먹은 비스킷 중엔 가장 맛이 없는 것 같네요. 하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도 운 좋게 제가 좋아하는 비스킷이 하나씩은 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맛있었던 비스킷을 하나씩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 저는 소아과 실습을 돌았습니다. 평소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블록 강의 때 공부하며 관심이 급상승한 소아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실습 돌면서 힘들지만 지루할 틈이 없을 정도로 재미있게 돌았고 특히 배울 점에 있어서는 학문적으로는 물론 학문 외적으로도 배운 점,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실습 일정 중에는 한 교수님의 외래에 들어가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특이한 인계가 있는데 '막대사탕 한 봉지'를 사 들고 가야 합니다. 외래에 오는 꼬마 환자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겠다는 건데 이게 참… 그냥 생각해보면 그 사탕을 학생들이 보충하도록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외래에 막상 들어가면 상황이 다릅니다. 이 교수님은 환자들에게 이경을 학생이 보도록 시키십니다. 나이가 있는 연장아의 경우에는 이경으로 진찰하는 게 그리 큰 일은 아니지만 나이가 적은 소아의 경우에는 이경이 그리 편한 진찰은 아닙니다. 한 손으로는 당기고 한 손으로는 이경으로 찌르는데 잘 참는 아이들에게나 못 참는 아이들에게나 환영 받지 못할 진찰입니다. 그래서 진찰이 다 끝나면 학생이 사온 막대사탕을 하나씩 쥐어줍니다.
처음부터 따져보면 누구에게나 win-win인 정말 합리적인 시스템입니다. 학생은 사탕을 사오는 대신 이경으로 진찰을 얼마든지 해볼 수 있고, 환자는 좀 아파도 진찰 하나 더 받고 사탕 하나도 받고 가니 좋고, 교수님은 학생 교육도 하고 환자 진찰도 하고 환자와 라뽀도 쌓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시스템이 있을까요?
소아과 실습 때 외래에서 정말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습니다. 역시나 꼬마 환자였는데 가정환경이 썩 좋지는 않은 환아였습니다. 병력 때문에 짧은 주기로 경과관찰이 필요한 환아라 아버지가 힘들게 멀리서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형편이었습니다. 이 환아의 진료가 다 끝나자 교수님은 숙제 내준 것 보여달라고 하시길래 뭔가 하고 봤더니 지난번 외래 때 책 10권을 읽고 읽은 책 제목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냈더군요. 환아 책 읽게 하는 데도 좋지만 환아의 아버지가 참 좋아하시는걸 보니 보호자와 라뽀 쌓기에 좋은 방법인 것 같았습니다. 얼마 전 외할머니 생신 때 조카에게 책 10권 읽고 읽은 책 제목 써오라고 했더니 외삼촌이 참 좋아하시더라고요.
교수님들께서도 항상 이야기하시고 예전부터 몸소 느끼고 있는 거지만 혼나면서 배우면 확실히 머리에는 잘 남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회진 중에 학생들을 가르쳐주시는 교수님들은 크게는 바로 설명해주시는 교수님과 질문을 하시는 교수님으로 나뉩니다.
질문을 하시는 교수님들은 학생이 대답을 못하는 경우 다시 두 방향으로 나뉘는데 학생을 비난하지 않고 친절히 설명해주시는 교수님과 온갖 비난(욕설은 거의 없습니다)을 섞어가며 설명해주시는 교수님으로 나뉩니다.
이 세가지 타입 중 어떤 타입의 교수님들이 학생들에게 가장 관심이 많은 지는 아직까지도 헷갈립니다. 하지만 확실히 세 번째, 학생의 무지함을 직접적으로 질타하는 방법이 학생 공부에 가장 도움이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렇게 혼나고 병원 밖을 나오면서 떠올려보면 "아 그래도 하나 배우고 가서 좋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여전히 반가운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