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의학 수준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과거 미국이나 유럽의 치료 가이드라인을 차용하는 것에서 벗어나 한국형 진료 지침을 만드는 의학회들이 늘고 있다.
또한 과거 미국와 유럽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진료 지침을 개정하면서 코호트 연구 등을 통해 획득한 한국인의 특성을 추가하는 작업도 한창이다.
체형부터 식습관, 나아가 생활 패턴은 국가마다 다르기에 이러한 사업들은 반길만한 일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보다 적합한 치료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진료 지침을 수립하는 과정을 보면 의아한 부분이 눈에 띈다. 바로 진료지침 수립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올해 말 진료 지침을 발표할 예정에 있는 한 학회는 20여명의 교수들이 모여 지침 기본안을 마련한 뒤 심평원과 마무리 작업을 논의중이다.
심평원의 의견을 반영한 뒤 공청회를 통해 진료 지침을 발표하겠다는 것이 이 학회의 계획. 결국 심평원이 마지막 감수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일부 학회들은 아예 지침 제정 과정부터 심평원과 함께 하는 곳도 있다. 모 학회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 학회는 진료지침 수립 위원회에 아예 심평원을 참여시켰다. 또한 이 지침을 심평원의 급여 기준과 연계한다는 계획이다. 지침의 시작부터 끝까지 심평원의 의견이 반영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방법은 일선 의사들이 진료 지침을 따를 경우 삭감을 피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심평원이 진료 지침 마련에 참여한 이상 이를 반영한 치료를 삭감할 명분이 없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과연 이러한 진료 지침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는 의문점이 남는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진료 지침은 심평원의 급여 기준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진료 지침의 의미에 대해 한번 짚고갈 필요가 있다.
진료 지침은 대한민국 의사라면 누구나 환자에게 최고의 치료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의 역할이다. 곧 누구나 '최선 진료'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길잡이인 셈이다.
하지만 심평원의 급여 기준은 이와 차이가 있다. 한정된 건강보험 재정을 보호하면서 일정 수준의 진료를 제공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적정 진료'의 틀이라는 뜻이다.
그러한 면에서 현재 의학계가 진료 지침을 수립하며 심평원을 개입시키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환자를 위한 최선의 치료법을 제시하고 더 많은 환자들이 이를 적용받을 수 있도록 정부를 설득해야 하는 것이 전문가의 역할이다.
이를 위해 전문가들은 연구를 통해 진료 지침의 합리적인 학문적 근거를 만들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불합리한 급여 기준을 바꿔가야 한다.
즉 학문적인 근거로 뭉쳐진 방패를 들고 불합리한 삭감이라는 창을 막아내며 싸워야 하는 것이 전문가의 사명인 것이다.
진료 지침이라는 방패를 만드는 중차대한 사업에 창을 든 심평원을 참여시키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자문해 봐야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