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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와 유럽문명의 완충지, 발칸[5]

물을 떠다오, 자그레브(1)


양기화
기사입력: 2016-03-21 05:04:54
양기화의 '이야기가 있는 세계여행'
물을 떠다오, 자그레브(1)


블레드성을 떠나 2시간쯤 달려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국경에 도착했다.

크로아티아는 슬로베니아처럼 EU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출입국수속을 밟아야 한다. 출입국관리소는 마치 톨게이트처럼 생겼는데, 승용차의 경우는 차안에서 여권을 제시하고 도장을 받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슬로베니아 쪽에서 출국수속을 밟고 걸어서 국경을 넘은 다음에 크로아티아 쪽에서 입국수속을 밟았다. 승용차의 경우에는 출국수속을 하는데 5-10초 정도 걸리기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 버스와 비슷하게 국경에 도착한 승용차는 1-2분 만에 국경을 넘어갈 수 있었지만, 앞에 버스가 3대나 서 있던 우리가 수속하기까지 20분 정도 걸렸다. EU국가들을 여행할 때 출입국수속절차가 생략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연히 쌩뚱맞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국경을 넘었으니 크로아티아이다. 공식적인 국가이름이 흐르바트스카 공화국(Republika Hrvatska)인 것은 크로아티아사람들이 자국을 흐르바츠카(Hrvatska)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크로아티아는 발칸반도의 판노니아평원의 교차점에 자리한 남동유럽국가이다.

북쪽으로는 슬로베니아와 헝거리, 동쪽으로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서쪽으로는 아드리아해로 열리는 긴 해안을 가지고 있다. 해안선의 길이는 1,778km이며 1185개의 섬까지 포함하면 5,790km에 이른다.

면적은 56,542㎢로 대한민국 영토의 절반보다 조금 크고, 인구는 427만명(2015년 기준)이며 크로아티아인이 90%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세르비아인이 4.5%, 보스니아인이 0.5% 정도이고, 기타 우크라이나인, 헝가리인 등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이런 인구구조는 크로아티아 전쟁과 보스니아전쟁 때문에 크로아티아인의 비율은 높아진 반면 세르비아인의 비율이 낮아진 결과이다. 크로아티아에 살던 세르비아인들은 세르비아와 스릅스카공화국으로 이주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보스니아전쟁을 피해 크로아티아로 이주했기 때문이다.(1)

크로아티아의 고대사는 이웃한 슬로베니아와 같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 고트족이 지배하고 있던 이 지역에 7세기 무렵 폴란드로부터 남슬라브계통의 크로아티아인이 이주해온 것이다. 그들은 아드리아해안을 따라 달마시안 크로아티아와 북동쪽 산악지역의 판노니안 크로아티아를 이루었다가 925년 크로아티아왕국으로 통합하고 토미슬라프왕이 즉위하였다.

페타르 크레쉬미르4세와 드미타르 즈보니미르왕의 전성기를 거쳐 200년 가까이 독립을 누리던 크로아티아왕국은 1102년 헝가리왕국과 연합을 맺었고, 오스만제국을 압박을 피하기 위하여 1526년에는 합스부르크왕가의 페르디난트1세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붕괴되자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왕국의 일원이 되었다가 1929년에는 유고슬라비아왕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한 나치독일은 크로아티아에 우스타샤라는 괴뢰 파시스트정권을 세웠는데, 우스타샤는 나치의 인종청소에 편승하여 크로아티아에서 세르비아인들을 몰아내려했다.

당시 약35만 명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그리고 집시가 학살되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끔찍했던지 나치조차도 고개를 흔들 지경이었다고 한다. 같은 남슬라브계통의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이 갈등을 빚은 데는 종교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유럽과 지역적으로 가까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일찍이 유럽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는데 반해, 러시아에 가까운 불가리아나 세르비아는 동방정교로 개종하고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전후 크로아티아는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연방의 일원으로 남았는데, 경제적 우위를 기반으로 더 많은 자치를 요구하여 세르비아와 갈등을 빚었다. 동유럽공산국가들이 몰락한 1991년 6월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는데, 세르비아인들이 많이 살던 크라지나(Krajina)가 크로아티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내전에 휘말렸다.

내전이 벌어지자 세르비아인들이 주도하던 유고슬라비아연방군이 크라지나를 돕는다는 구실로 크로아티아를 침공하였고, 크로아티아국토의 4분의 1을 세르비아민병대와 유고연방군이 점령하게 되었다. 7개월에 걸쳐 약 1만 명이 죽고 수십만 명의 피난민이 발생하자 1992년에 유엔이 개입하여 세르비아가 점령한 크로아티아지역에 평화유지군을 배치하였다.(2)

불을 밝히고 길거리 농구에 빠진 자그레브 젊은이들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국경을 넘을 무렵 짧은 초겨울해가 저물기 시작해서 자그레브에는 벌써 밤이 깊어가는 듯 차량만 드문드문 지나다니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어 쓸쓸한 느낌이 든다. 가게들도 대부분 문을 닫아서인지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이 더 외로워 보인다. 버스는 자그레브의 배꼽이라고 하는 옐라치치광장 가까이에 섰다. 숙소에 가기 전에 시내를 돌아본다는 것이다. 가이드를 따라가다 보니 거리에 불을 밝히고 길거리농구를 즐기는 젊은이들도 보이지만 컴컴한 밤거리는 여전히 쓸쓸하기만 하다.

일행을 성슈테판성당으로 안내한 가이드는 간단한 설명 끝에 자유시간을 주었다. 40여분 뒤에 버스로 오라는 것이다. 늦은 밤 생소한 도시에 떨구어 놓고 1시간 동안 구경하는 것으로 자그레브관광을 마치겠다는 생각인 모양인데 여행초반이라서 황당하면서도 어떻게 할지 감이 안 온다.

자그레브대성당(좌), 감시탑(우)
옐라치치광장을 오른쪽으로 돌아 야트막한 언덕길을 따라 오르다보니 밤하늘에 우뚝 솟아있는 두 개의 첨탑이 눈길을 끌었다. 성모승천대성당이라고도 부르며, 크라아티아돈 1000쿠나짜리 지폐의 뒷면을 장식하는 성슈테판성당이다.

성슈테판성당은 1093년 헝가리의 왕 라이스라우스(Ladislaus; 1040-1095)가 이 곳에 있던 교회를 대신할 대성당을 지으라는 하명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가 죽은 직후에 고딕양식으로 짓기 시작하여 1217년에 완공을 보았고, 당시 헝가리 왕 앤드류2세가 축성한 것이다. 1242년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었지만 40년쯤 뒤에 재건되었다. 15세기 오스만제국이 침략해오자 성당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변에 요새를 쌓았고, 요새의 일부는 지금도 남아있다. 17세기에는 남쪽 감시탑을 설치하였다.

이 성당은 1880년 자그레브지진에 무너졌고, 정면에서 보았을 때 폭이 46m, 높이가 77m에 신고딕양식으로 된 현재의 성당은 1906년에 복구가 끝난 것이다. 성당의 내부면적이 1,671㎡로 5,000명이 동시에 입장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 성당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108m의 첨탑을 성당의 서쪽 입구 좌우에 세웠다. 두 개의 첨탑은 도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명물이다.(3)

카프톨 언덕을 지키고 있는 성모승천대성당은 위세등등한 이슬람세력에 대항하는 가톨릭신도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이준명작가는 대성당입구에 세운 칼을 들고 있는 성녀와 창으로 용을 찌르는 기사 등 수호성인의 모습에서 전쟁으로 점철된 카프톨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고 했다.(4)

들어가 보지 못한 대성당의 내부에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롯하여 르네상스시대의 교회의자, 대리석 제단, 바로크풍의 설교단 등이 볼만하며, 특히 13세기에 제작된 프레스코화는 꼭 보아야 한다고 했다. 정원 어딘가에 무너진 옛날 성당의 잔해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자그레브대성당의 제단(좌-위키피디아에서 인용함), 성모마리아와 네 천사의 분수(우)
대성당 앞에는 사방으로 천사들이 호위하고 있는 가운데 금빛으로 빛나는 성모마리아상이 높이 모셔져 있다. <성모마리아와 네 천사의 분수>는 오스트리아 조각가 안톤 도미니크 리터 폰 페른코른(Anton Dominick Ritter von Fernkorn)의 1873년 작품이라고 한다.(5) 두 손을 아래로 펼친 성모마리아의 모습은 성당을 가톨릭신자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봉헌한 대성당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참고자료

(1) 위키백과. 크로아티아.
(2) 세계여행정보. 크로아티아. 신발끈.
(3) Wikipedia. Zagreb cathedral.
(4) 이준명. 어느 멋진 일주일 : 크로아티아 34-35쪽, 봄엔, 2012년
(5) Tourism - Holy Mary's Column With Angels And Fountain - Official Local Tourism Attractions on Waymark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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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ef*** 2020.09.00 00:00 신고

    먹먹하네.
    의약분업때 당해놓고, 또 당하네. 일단, 코로나 넘기고, 재논의하자. 노력하자.
    추진'강행'은 안해주마. 애초에 논의한 적 없이
    일방적 발표였으니, 재논의도 아닌 거고, 노력이란 애매모호한 말로 다 퉁쳤네. 추진 안 한다가 아니라 강행하지 않는다니,
    (현 정부 꼬락서니를 보면, 관변어용시민단체 다수 동원해, 국민뜻이라며 언론플레이후, 스리슬쩍 통과. 보나마나 '강행'은 아니라겠지.)
    정부 입장에서 도대체 뭐가 양보? 의사는 복귀하도록 노력한다가 아니라 복귀한다고. 욕먹고, 파업한 결과가 참,

    • heef*** 2020.09.00 00:00 신고

      먹먹하네.
      의약분업때 당해놓고, 또 당하네. 일단, 코로나 넘기고, 재논의하자. 노력하자.
      추진'강행'은 안해주마. 애초에 논의한 적 없이

    • heef*** 2020.09.00 00:00 신고

      먹먹하네.
      의약분업때 당해놓고, 또 당하네. 일단, 코로나 넘기고, 재논의하자. 노력하자.
      추진'강행'은 안해주마. 애초에 논의한 적 없이

  • heef*** 2020.09.00 00:00 신고

    먹먹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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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진'강행'은 안해주마. 애초에 논의한 적 없이
    일방적 발표였으니, 재논의도 아닌 거고, 노력이란 애매모호한 말로 다 퉁쳤네. 추진 안 한다가 아니라 강행하지 않는다니,
    (현 정부 꼬락서니를 보면, 관변어용시민단체 다수 동원해, 국민뜻이라며 언론플레이후, 스리슬쩍 통과. 보나마나 '강행'은 아니라겠지.)
    정부 입장에서 도대체 뭐가 양보? 의사는 복귀하도록 노력한다가 아니라 복귀한다고. 욕먹고, 파업한 결과가 참,

  • heef*** 2020.09.00 0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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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진'강행'은 안해주마. 애초에 논의한 적 없이
    일방적 발표였으니, 재논의도 아닌 거고, 노력이란 애매모호한 말로 다 퉁쳤네. 추진 안 한다가 아니라 강행하지 않는다니,
    (현 정부 꼬락서니를 보면, 관변어용시민단체 다수 동원해, 국민뜻이라며 언론플레이후, 스리슬쩍 통과. 보나마나 '강행'은 아니라겠지.)
    정부 입장에서 도대체 뭐가 양보? 의사는 복귀하도록 노력한다가 아니라 복귀한다고. 욕먹고, 파업한 결과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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