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가 멀리 동해에 있는데 강원도에 속해 있다. 수로가 멀고 험해 섬사람들을 데리고 나오면서 현재 비어 있다. 요즘 일본인이 죽도(竹島)라 부르면서 백성들의 어로 활동을 금지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우리 입장을 설명해도 일본은 들을 생각이 없다. 혹자는 장수를 보내 점거해 지키자고 하고, 혹자는 혼란을 만들지 말고 일본인의 왕래를 허용하자고 한다. 변방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킬 방도를 강구해 자세히 나타내도록 하라."
숙종이 출제한 책문(策問)이다. 책문은 정치적 현안 중 가장 시급한 것을 임금이 묻고, 대과의 초시와 복시를 거친 응시생이 논술형태로 견해를 밝히는 과거시험의 마지막 과정이다.
조선시대 과거는 두 단계의 소과(초시, 복시)와 세 단계의 대과(초시, 복시, 전시)로 나뉜다. 대과(大科)의 복시(覆試)까지 통과하면 일단 급제이다. 책문에 해당하는 대과의 전시(殿試)를 통해 선발된 사람의 최종 등급을 결정한다.
지금의 사법연수원에서 성적순으로 임용권을 부여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책문에서 1위를 한 사람을 장원급제했다고 말한다. 책문에서 꼴등을 해도 급제는 취소되지 않다. 임금에게 책문은 창덕궁 춘당대(春塘臺)에서 급제자 33명을 만나는 일방적 상견례이자, 대책(對策)의 장이었다.
숙종의 책문은 오늘날 현안과 닮았다. 대학입시 논술도 그렇다. 그러나 논술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지 20대의 지식을 갖췄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라면, 책문은 현안에 대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과거 합격자의 포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과거합격자 평균연령이 35세임을 감안할 때, 당시 건강수명 대비 나이를 고려한다면 기본적으로 시험을 준비하는 자세와 시험에 임하는 깊이가 다르다.
내가 질문하고 내가 답한다
3년에 한 번 치른 과거는 응시자가 많을 때는 문․무과를 합쳐 6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개중에는 과거시험에 대비해 '족보'에 의존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책문에서 상위권을 점하려는 사람에게 족보는 무용지물이었다.
필자는 미국 유학시절 족보를 경험하지 못했다. 일단 족보가 돌아다니지 않았다. 시험 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하려 한 적도 없다. 전년도와 개설과목이 같고 기본교재가 같아도 추가교재와 미리 읽어야 할 논문자료가 최신 것으로 바뀌니 족보가 소용이 없었다.
시대흐름이 변하는데 실라부스의 변화가 없다면 죽은 수업이나 다를 바 없다. 대학 선생은 학생끼리 유사한 생각을 적어내면 치팅으로 간주한다. 사람이 다르니 생각도 같을 수 없다는 독창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문화다. 인문․자연 똑같다. 우리나라 고교생이 수학의 정석 풀이과정을 외워서 기계적으로 푸는 것과 달리, 어떤 문제라도 풀이과정은 같을 수는 없다고 여긴다.
미국과 영국의 일부 상위권 대학에서는 한국학생의 대학입학 지원서를 따로 평가한다. 다른 나라 학생에 비해 우리나라 학생의 지원서는 대체로 비슷해서 독창성을 판단하기 힘들다고 한다.
우리나라 대학에서도 시험이든 자기소개서든 족보 의존도가 높다. 요즘은 사례금으로 금품을 제공하고 비밀리에 족보가 거래되기도 한다. 최근 로펌 입사를 위한 인턴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과제물을 내거나 시험을 치르는 과정에서, 족보 답안을 쓴 명문대 법학전문대학원 출신 입사자가 탈락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하던 습관이 사회에서 통용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담당 선생이 교육과정을 심화, 업그레이드하지 않는 과목일수록 족보가 세밀하다. 스캐너가 없던 시절 노트 복사본을 친구가 복사하고, 다음 해에는 후배가 복사하니 원문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위에 굵은 펜으로 덮어 쓴 복사본이 돌곤 했다.
대학 선생들이 내는 시험문제가 매년 비슷해서일까.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학생들의 심정 때문일까. 매년 똑같은 문제인데 똑같은 답을 적어도 높은 성적을 받기 때문일까.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완벽하게 공부를 마치기 위해 족보라는 수단을 선택하는 학생이 많다.
그러나 모범답안에 의존하면 나도 모르게 주어진 일만 100% 완수하는 성향을 갖게 된다. 물론 당장 결과가 좋으면 주변의 칭찬을 받을 수 있고, 스스로 잘해냈다는 자부심은 가질 수 있다.
그렇더라도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 족보를 찾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병원경영에 족보는 없다. 좋은 선생이 되는 족보도 없다. 더욱이 인생의 미래지도에는 족보가 없다. 스스로 책문을 만들고, 그 질문에 대책(對策)하는 과정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