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사토리 세대가 있다. 종교인이 아니다. 1980~1990년대에 태어난 20대 중반까지의 젊은이다. 돈벌이나 출세에 관심이 없고 브랜드 옷이나 차량도 구매하지 않는다. 여행도 가지 않고 연애도 하지 않는다. 장기불황으로 사회에 기댈 수 없으니 현실을 인정하는 성향이 강화된 것이다.
NHK 조사에 따르면 20대 10명 중 9명인 89%가 현재 삶에 만족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일본경제의 잃어버린 10년이 낳은 후유증이다.
일본의 경쟁력은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급속하게 낮아지기 시작한다. 1달러에 259엔이던 환율은 1년 만에 150엔이 된다. 1달러 어치 수출에 109엔 손해 보는 셈이다.
내수경기 부양책으로 일본정부가 내놓은 카드는 금리인하였다. 5%이던 대출금리가 절반으로 잘려나가고 50년 장기대출상품이 쏟아졌다. 현금이 남아돌고 돈을 쉽게 빌릴 수 있으니 서민들은 너도나도 돈을 빌려 집을 샀다.
요우커, 푸이다이가 제주도에 투자하는 것처럼, 당시 일본은 하와이 토지에서 뉴욕 맨해튼의 록펠러센터까지 매입했다. 일본 국토를 팔면 미국을 몇 개 산다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로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
부동산 거품에 대한 일본정부의 대책은 금리를 더 낮추고 세재혜택을 주는 것이었다. 대출금리가 0.5%까지 내려가고 감세정책을 폈다. 부동산담보대출을 100%까지 지원했다. 일본정부는 국채를 발행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시작했다. 통화량 확대정책이다. 거의 공짜로 돈을 빌려 산 부동산이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오르니 더 빌리고, 더 사려는 사람이 많았다.
1990년 일본의 부동산 거품은 붕괴한다. 자산가격은 정점 대비 3분의 1 수준, 많게는 4분의 1까지 떨어졌다. 건설사와 은행이 도산했다. 은행채무자에게 남은 것은 엄청난 부채와 가치가 떨어진 부동산이었다. 행복해야 할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10년' 속에서 보낸 사토리 세대는 욕구도, 희망도 없다고 말한다.
보건의료계의 삼포; 지역 포기, 직급 포기, 전공 포기
우리나라도 이런 상황에 직면해 있다. 88만원 세대, 삼포세대라는 말이 생겼다.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이 서로 다른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서서히 일본을 따라갈 거라는 우려가 있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 비전문직종 종사자가 가장 먼저 타격을 받고, 곧 전문직 종사자까지 영향을 받는다. 전문직 종사자까지 경기에 영향을 받는 데는 자격 취득이 쉬워지고, 자격 취득자를 양산한 제도 변경이 한몫했다.
2007년 로스쿨법 통과 후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변호사들이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고, 공인회계사도 90년대 200~300백 명 정도였던 것이 시험제도가 변경되고 선발인원이 늘어 2001년부터는 거의 매년 1,000명이 2차 시험을 통과한다. 빅4 회계법인을 제외하면 취업시장이 막혀 군소 법인이나 개인사무실을 차려 저가수임 악순환을 반복한다. 경제에 버블이 있듯이 전문가 시장도 마찬가지이다.
보건의료계도 안전지대는 아니다. 더 이상 직업의 안정성, 수입, 경력의 전망을 보장받지 못하는 때가 오고 있다. 사무실이든 병원이든 개업했다고 고객이 밀려오던 때는 지났다. 점진적으로 '지역 포기, 직급 포기, 전공 포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A 원장은 개원 장소를 물색하면서 고향이자 출신대학 소재지를 포기했다. 대도시일수록 정도는 심하다. 신도시나 뉴타운 부지에 개원하는 것을 신중히 고려한다. 가족은 대도시에 거주하니 정작 본인은 장거리 출퇴근을 감수하거나 현지에도 거취를 정한다. 이제는 퇴직을 앞두고 근무기간 연장을 위해 봉직의를 택하기도 한다. 낮은 연봉으로 하향 이동하는 미국의 직업 흐름은 앞으로 한국 의료계에서도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모 대학 A 조교수도 대학 선생이 되기 위해 '지역 포기, 직급 포기, 전공 포기'를 택했다. 출신교에 남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어렵게 받은 답변은 다른 학교를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해당연도에 퇴직자가 없고 교실 T/O가 늘지 않았다는 이유다.
전공 포기라는 강수를 두기도 한다. 성적은 부족하지만 학교에 남고 싶다. 전공은 상관없다. 교원이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순서가 조금 밀리는 경우 나보다 뛰어난 동료가 진로를 바꾸면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비인기 교실의 주임교수는 오히려 이를 강점으로 학생들을 유혹(?)하기도 한다.
6·25전쟁 당시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떠오른다. 역사적 진위는 밝혀진 바 없지만 모두에게 총을 지급한 것이 아니라, 총 가진 병사가 죽어야 다른 병사가 그 총으로 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누군가 죽어야 본인을 보호할 수 있는 운명이었다. 삼포세대 직장인도 비슷하지 않을까. 기술개발로 여러 명이 해야 할 일을 혼자 하다가 과로로 병원에 실려 가야, 나머지 사람에게 그나마 과로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다.
위 사례는 다소 극단적인 사례이니 일반화하지 않아도 된다. 직업의 귀천을 떠나 과거와 달라진 경로를 예로 들었다. 다만 윗세대의 혜택이 내게 그대로 올 거라는 과도한 기대는 유의해야 한다. 소설가 손창섭이 말한 잉여인간은 우리 세대에게 시대별, 지역별, 그리고 직종별 다른 개념으로 다가온다. 의료계의 잉여사회는 독자가 정의 내리기 바란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저서 '세계는 평평하다(The world is flat)'에서 “국경과 민족의 경계를 넘어 누구나 동일한 기회와 자유가 주어지는 세계화를 거스를 수 없다”고 말한다.
좁게 보면 선배들에 비해 업무기회가 줄어드는 것 같지만, 아직은 인도 의사가 원격의료로 우리나라 의료계 일자리를 빼앗아가지 않는 것을 작은 위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또한 대체될 수 없는 나만의 역량을 키우라는 신호로 이해하면 된다.
지금까지 예비 의료인에게 닥칠지 모를 네 가지 위기요인을 살펴봤다. '이건 나한테 해당하지 않는다, 나는 4개 중 절반이네'라며 안도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네 가지 중 단 하나라도 마음에 와 닿았다면 편안히 받아들이기 바란다.
'지금 이대로의 상태를 유지한다면'이라는 한 가지 단서가 붙기 때문이다. 알고 받아들이는 것과 모르고 있다가 놀라는 것은 다르다. 요즘은 보건의료계에도 전문 자격 취득 후 선택하는 직업의 폭이 훨씬 다양해졌다. 어디서 무엇을 하건 쉬지 않고 직업을 가지는 것 자체가 전문가의 역할을 다하는 것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