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방학이 끝나고 다른 학년들은 한참 방학을 즐기고 있을 시기에 연말 연시만 쉰 우리 학년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곧바로 4학년 실습을 시작했다.
몸만큼 마음도 무거웠는데, 그 이유는 작년에 비해 훨씬 많은 수의 과를 5~6개월 내에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3학년 때는 흔히 메이저라고 말하는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정신과 그리고 내과 실습을 돌았는데 모두 환자를 직접 만나서 문진을 하고 처치를 하며 경과를 지켜보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소위 마이너 과에는 환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는 과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병리나 진단검사의학, 영상의학과 등이 그 예에 해당한다.
4학년 첫 실습으로 병리과를 돌게 되었다. 사실 환자를 보지 않는 과는 어떨지 감이 잘 오지 않아 궁금한 점이 많았다.
병리과는 판독실, 검체 보관소 등과 함께 있었는데 병리과 의사 외에도 슬라이드를 제작하거나 관리하는 기사분들이 많았는데, 미생물이나 병리학 실습 때 보던 슬라이드들이 엄청나게 많아 보였다.
우리 실습 조 다섯명이 모여 교수님의 수업을 듣는데, 수업 시작에 앞서 교수님께서는 수업 중에 '프로즌'이 생기면 잠시 수업을 멈춰야 한다는 양해를 구하셨다.
여기서 '프로즌'이라 함은 수술 중에 환자 신체 일부인 조직을 떼어내어 악성 여부를 판단하거나 조직의 특성을 파악해야 할 때 병리과로 조직을 보내면 자세하진 않지만 간단하게 나마 빠른 판독을 요청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 판독 결과에 따라 환자의 신체 기관이나 조직 부위를 더 절제할지 등의 추가적인 수술 범위를 결정하기 때문에 시간대에 상관없이 수술이 끝나기 전에 되도록 빨리 판독을 해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실제로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리사 한 분이 "프로즌이요."라며 검체를 가져 오셨고, 교수님께서는 현미경으로 살펴 보시더니 판독 결과를 전화로 수술방에 알리신 뒤 우리 조원들에게도 설명해주셨다. 악성 조직에 대한 수업 중이었는데 바로 실제적인 예를 보게 되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병리과는 환자를 직접 마주하지는 않기 때문에 응급상황이 있지는 않으나 응급 수술이 있는 경우 ‘프로즌’ 같이 신속한 판독을 요하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타과에서 조직검사가 필요한 경우에도 병리과의 역할이 중요한데, 필자의 경우는 최근에 어머니께서 갑상선에 결절이 있다는 건강검진 상 진단을 받으셔서 Fine needle biopsy를 받으셨고, 이 때도 병리과의 판독까지 일주일 정도의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처럼 임상 환경에서 환자에 대한 질환을 진단하고 조직의 양성, 악성 여부를 판단하여 치료 방법을 정할 때 병리과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보통 요즘 학생들은 흔히 임상에서 환자를 대하는 전공 위주로만 진로를 고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조직을 판독하고 분석하여 임상 의학에 큰 도움을 주는 병리과 의사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의미 있는 전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께서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병리과로의 진로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관심이 있다면 언제든지 병리과 의국의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을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