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이 나지 않는 수가, 만만치 않는 시간, 50이 넘긴 나이 그리고 갖가지 의료사고 위험. 이 모든 것을 무릅쓰고도 자연분만만을 고집하는 산부인과 의사라면 그는 경제원리를 가장 우선시하는 이 시대에서 유별난 사람이다.
언제 분만이 시작될지 몰라 병원 근처 5분 거리를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며, 집에서도 초록한 수술복이 익숙한 산부인과 의사라면 그는 일에 중독 됐거나 일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11월의 조금은 차가운 기운이 가신 어느 날 은혜산부인과 장부용 원장을 만났다. 이미 알려진 대로 장 원장의 병원은 자연 분만이 많은 병원 중 하나이다. 10%대의 낮은 제왕 절개율로 한국 여성 민우회에서 ‘아름다운 병원’으로 뽑힌 적도 있다.
그런 장 원장이었기에 이미 사진으로 그의 이미지를 나름대로 ‘편안한 아주머니’로 설정하고 만났지만 실제로는 ‘편안한 아주머니’와 함께 강단 있고 추진력 있는 ‘여장부’의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96년 혼자로 시작했던 그의 산부인과 병원은 이제 산부인과 전문의만 3명에 초음파 전문의 1명에, 간호사 20여명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병원 역시 조촐한 2층, 한 층을 넘어 4층 건물 전체를 통틀어 쓸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래서 장 원장이 이제는 병원 원장으로서 조금은 여유롭게, 가정과 자녀를 보살피고 삶을 여유롭게 보내지 않을까 했다. 그래서 그의 삶의 다양한 영역을 자유롭고 편안하게 듣고 싶었다. 점심시간이야 간신히 시간을 낸 장 원장을 보면서 ‘오판’이였음을 금세 깨달았다.
은혜산부인과에서 한달에 태어나는 140여명 이상의 생명 중 장 원장은 100여건 가까이 직접 맡아 생명 탄생의 순간을 목도하고 있었다. 하루에 3~4건이 분만이 있는 셈이다. 자연분만이기 때문에 하루를 온통 생명 탄생에 몰두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나이도 50을 넘어 여유를 찾을 때가 된 듯 했으나 생명에 대한 열정은 막을 수 없는 듯 했다.
”어떻게 된 게 아이가 꼭 야간에 나오게 되네요. 그러면 어김없이 제가 아이를 직접 받습니다. 언제 아이가 나올 줄 몰라 평소에도 병원 5분 넘어 거리를 쉽게 벗어나지 못해요”
그의 집도 병원 건물 꼭대기 층이다. 언제든지 아이를 받을 준비가 돼있다. 집에서는 초록색 수술복을 입고 있을 때가 많단다. 어떤 날은 수술복이 잠옷이 되기도 한다고. 그러면 어김없이 분만환자가 찾아와 그의 도움을 청하곤 한다.
일요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도 아이를 받으러 뛰어가는 그다.
“처음에는 분만 촉진제를 써보기도 했지만 자연스럽지가 않았어요. 정상인 산모가 자연스럽게 아이를 놓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게 가장 좋고 안전한 방법이에요. 분만의 고통을 체험한 산모는 모성애가 더욱 깊어지고 아이들을 잘 양육하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어요”
장 원장의 노력과 열정은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그지만 의료사고에 대한 두려움은 상당히 컸다. 상당히 방어적이었다. 그는 의료사고와 관련해 따라오는 인격적 상처에 대해서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최근에 한 산부인과 의사 이야기를 들었어요. 의료사고가 났는데, 가족들이 아이 관을 병원에 가지고 들어가기도 하면서 서로가 격하게 다퉜어요. 결국 그 젊은 의사 선생님은 상처를 받고 다시는 분만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답니다. 의료사고에 대해 명확하게 해결할 방안이 마련돼 있지 않으니까 서로가 대립할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사고의 위험으로 분만을 꺼려하는 의사가 늘어난다면 결국 국민에게 손해가 갈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가 권해서 진학한 의대
자연분만과 의사의 역할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였기에 어려서부터 의사가 꿈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장 원장은 그의 아버지가 의대를 권했다고 말했다.
장 원장의 생각에 아버지는 여성이 경제력이 있어야 앞으로 혹시라도 이혼이나 사별할 경우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권했던 것 같단다. 그런 그의 인생이 파란만장하게 펼쳐질지는 장 원장 자신도 알았을까.
의과대학 시절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면서 그의 변화는 시작됐다. 레지던트 시절 남편을 만나 결혼도 했다. 이후 대학병원에서 일하던 중 의료선교에 뜻을 둔 남편과 함께 서사모아로 떠나 4년간 현지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남편은 신학의 길을 본격적으로 밟아 이제는 신학 교수이자 목회자가 됐다. 그래서 장 원장 역시 목회자의 사모가 된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이 사모의 위치에 적절치 않다며 아직 배워가는 과정이란다.
그 역시 최근에는 남편이 교수로 있는 신학대학원 2학년을 다니고 있단다. 대학원에 가는 월요일이 유일하게 병원을 떠나는 날이다. 그러면서 없을 거 같은 취미가 떠올랐다. 교회에서 성악과 크로마하프를 뒤늦게 조금씩 한다고 한다.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장 원장은 1남 3녀를 두고 있다. 서사모아를 가기전 3명을 낳았고, 다녀온 후 1명을 낳았다. 모두 자연분만이었다. 장 원장은 바쁜 어머니의 삶 속에서 착하게 잘 자라준 아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갖고 있었다.
자연분만센터의 꿈
장부용 원장은 가슴에 품은 꿈이 있다. 그는 지금의 병원이 ‘자연분만센터’가 되었음 한다. 그가 말하는 자연분만센터는 분만이전부터 신생아 수유, 아이 인성교육까지 복합적으로 이뤄지는 곳이다.
그러려면 분만센터가 가족들이 산책을 할 수도 있고,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요양원 같은 공간이 되어야 한다. 또 산부인과와 소아과가 함께 있어 아이에게 발생할 수 있는 긴급한 상황을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지대가 높은 서울 시내에서 그런 공간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그는 “항상 마음속에 자연분만센터를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박노해는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며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샛길”이라며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노래했다. 스스로 희망을 품고 길을 찾는 장 원장이 그래서 아름다워 보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