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설립된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원장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이 2010년 화두로 ‘근거 중심의 임상진료지침 제정’을 꺼내들었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 허대석 원장은 3일 메디칼타임즈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지난해에는 연구원을 안착시키는데 집중했고, 나름대로 성공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보건의료연구원은 보건의료 기술·제품에 대한 경제성 분석, 임상성과 평가를 통해 객관적인 근거(Evidence)를 소비자·보험자·의료기관 등에 제공하기 위해 보건의료기술진흥법에 따라 지난해 3월 개원했다.
의료 공급자에게는 의료행위의 기준을 제시하고, 의료 수요자에게는 맞춤식의 정확한 의료정보를 제공, 국민의 의료 선택권을 보장하자는 게 설립 취지다.
보건의료연구원은 개원한 지 채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지난 9월 종교단체, 법조계 등 각계 전문가의 의견 수렴을 거쳐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위한 12개항의 기본원칙을 마련, 법적 제도화 기반을 구축한 게 대표적인 업적이다.
특히 이 사례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이라는 사회적 의제가 제도화되기 위해서는 의료계 내부의 가이드라인 수준을 넘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하며, 중립적 입장에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1997년 보라매사건 이후 의료계는 연명치료 중단을 위한 가이드라인, 성명서를 꾸준히 발표해 왔지만 1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데 실패했다.
허대석 원장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이라는 사회적 의제는 의사들의 입장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가치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면서 “종교단체나 법조계 등 각계가 합의한 결과 해결점을 찾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보건의료연구원은 2009년 1회용 치료재료 재사용, 태반주사 및 글루코사민 효과와 안전성 평가 등 30여개 연구용역을 발주하고, 일부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중립적 입장에서 임상 적용 잣대를 제시했다.
보건의료연구원의 새해 역점 사업은 근거 중심의 임상진료지침 제정이다.
허대석 원장은 “우리나라는 국가적인 임상진료지침이 없고, 요양급여기준이 이런 지침을 대신하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의료계가 자율적인 진료가이드라인을 발표하더라도 급여기준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못 박았다.
이런 현실이 정부와 의료계간 불신의 출발점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일례로 영국의 경우 NICE(National Institute of Health and Clinical Excellence)는 사회적 합의에 근거한 임상진료지침을 제정하고 있으며, 이 지침은 국가적인 가이드라인으로서 의료보험정책에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 원장은 “2007년 정부는 의료법을 개정하면서 임상진료지침 제정을 명문화하려고 했지만 의료계의 오해와 반발로 백지화된 바 있다”면서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이를 수용하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LCD TV와 위암수술을 예로 들어 임상진료지침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허 원장은 “LCD TV를 구매하기 위해 제주에서 서울까지 올 필요가 없는 것은 규격화, 유통구조에 기인한다. 반면 위암은 어떤 의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치료효과가 달라지다보니 서울로 몰리는 것”이라고 환기시켰다.
의료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임상진료지침을 제정해 의료기관에 보급하면 환자들이 굳이 서울 대형병원에 오지 않더라도 효과가 검증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허 원장은 “모든 의사가 모든 의료행위를 잘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혼동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면서 “국민 입장에서 어떤 의사가 어떤 의료행위를 하는 게 적합한지 분명히 해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없지 않겠느냐”고 못 박았다.
그러나 그는 임상진료지침은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제정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허 원장은 “임상진료지침은 의료행위에 대한 원칙적 기준을 정하자는 것으로 사회적 합의사항을 담는 것”이라면서 “따라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제정해선 안된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허대석 원장은 “의료는 의사와 환자, 정부, 산업계, 보험자 등 다양한 이해가 걸린 다자간 관계”라면서 “의료계는 환자의 입장에서 스스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임상진료지침이 제정되면 의사와 환자가 상호 신뢰하는 의료 환경이 자리를 잡아갈 것”이라면서 “이런 합의점을 도출해 나가는 게 보건의료연구원의 존재 이유”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