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영업사원 간 신뢰도가 크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의사는 영업사원을 무의미한 존재로, 영업사원은 의사를 그저 약 처방을 위한 접대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커진 탓이다. <메디칼타임즈>는 최근 영업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태를 파악, 이를 개선할 수 있는 근본적인 치유책이 무엇인지 진단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편집자주-
#1. 호감가는 얼굴을 가진 국내 A사 여자 영업사원. 어느날 자신의 담당처 B내과를 방문했을 때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장이 여름 휴가 때 1박 2일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 것.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자사약 처방에 불이익을 받을까 내색은 못하고 선약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성급히 문을 나섰다.
#2. 국내 B사 영업사원은 근무 중 어이없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대학병원에 근무하다 최근 성형외과를 개원한 김 모 원장이 차에 흠집이 났으니 와서 처리해달라고 한 것. 평소 친한 사이인 것은 맞지만 이런 것까지 해줘야 하나 당황스러웠다.
#3. 매번 환자가 북적이는 인천의 C내과 원장은 최근 골머리가 아프다. 많은 환자 때문이 아닌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제약사 영업사원들 때문이다. 만나봤자 특별한 정보가 없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지만, 젊은 친구들 맘에 상처를 남길까 쉽게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4. D대학병원 모 교수. 잦은 영업사원 방문을 참지 못해 결국 연구실 문에 경고성 편지를 붙여놓았다. '제약사 영업사원들에게 부탁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지금 만나고 싶지 않은데 계속 요청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의사와 영업사원 간의 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의사는 영업사원을 무의미한 존재로, 영업사원은 의사를 자사약 처방을 위한 접대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현상이 지속된 탓이다. 복제약 위주의 국내 제약업계가 실적 지상주의에 목을 멘 결과기도 하다.
먼저 영업사원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의사 접대'라고 자조섞인 푸념을 한다.
다국적제약사 모 영업사원은 "종합병원을 할당받으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약제심의위원회 명단을 입수하는 것"이라며 "실세 교수를 파악해 교수별 성향과 취미, 스케줄 등을 꿰뚫어 편의를 제공한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병원에 약을 넣을 때 유리하다"고 귀띔했다.
이 영업사원은 "쌍벌제가 도입된다지만, 갑을관계로 엮어진 관계가 지속되는 한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라며 "뭔가 원하는 눈치가 있으면 재빠르게 캐치해 요구 사항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영업사원 최우선의 능력"이라고 푸념했다.
국내 중소 A사 영업사원도 비슷한 처지다. 매주 일요일마다 거래처 원장이 다니는 교회에 나가며 자사약 처방을 유도하고 있다.
그는 "내가 맡은 로컬 시장은 원장과 친분 관계가 곧바로 실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당분간 주말은 포기하기로 했다"며 "가끔 뭐 좀 할 수 있냐는 부탁을 받는데 우리 입장에서 부탁이 아닌 강요로 들린다. 한마디로 의사의 종 노릇을 하고 있다"고 허탈해했다.
영업사원을 바라보는 의료계의 시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큰 존재감이 없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인천 성형외과 모 원장은 "제약사들이 경쟁적으로 영업사원을 확충해서 그런지 몰라도 하루에도 몇 명의 영업사원이 찾아오는지 모르겠다"며 "특별한 용건보다는 인사차 찾아오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현 상황을 전했다.
이 원장은 이어 "영업은 상대방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무언가를 개발해 고객을 찾아갈 때 빛이 나는 것"이라며 "과거처럼 무작정 방문 횟수 늘리기에만 몰두하는 영업사원을 보면 솔직히 마주하고 싶지 않다. 시간만 뺏긴다"고 토로했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쌍벌제로 무분별한 영업사원 디테일 행위를 막아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그는 "가끔은 영업사원 디테일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신제품이나 최신 임상 정보 추가 등의 정보는 유용할 때도 있지만, 이런 것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신변잡기 얘기가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올해 말 쌍벌제가 시행되는데, 영업사원 병의원 방문을 크게 제한 둘 필요가 있다'며 "그들은 오랜만에 찾아올 지 몰라도 나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영업사원들의 방문 요청을 받는다. 업무에 지장이 올 정도'라고 하소연했다.
업계는 이런 현상들이 지속될 경우 쌍벌제 등 정부가 내놓은 정책이 실효성을 거두기는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근본이 치유되지 않고서는 리베이트를 뿌리뽑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국내 모 제약사 임원은 "세계 어느나라를 보더라도 한국과 같이 의사와 영업사원 간의 신뢰도가 떨어진 나라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 임원은 이어 "하루빨리 인식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제약사도 현실을 탓할 것만이 아니라 영업사원이 의사에게 편익 제공만이 아닌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줘야 한다. 수평적 협력관계가 되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국적 제약사 모 관계자도 "(리베이트를 막기 위해) 윽박지르는 정책보다는 서로 존중하는 풍토 형성이 더욱 절실해 보인다"며 "영업사원 역시 의사를 접대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고 본연의 업무인 의약 정보를 전달해주는 등 능동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것들이 모여 서로간 인식 전환의 발걸음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