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잠든 덕분인지 모닝콜을 받기도 전인 4시 반에 눈을 떴다. 일찍 일어난 덕분에 무슬림들에게 새벽기도를 알리는 아잔을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모로코, 터키 등 이슬람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새벽 아잔을 들은 기억이 없는 것은 어쩌면 잠들어 있었거나 혹은 방음이 잘 된 숙소에서 묵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내전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 있는 모스타르에서 아잔을 듣는 새벽 아잔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잔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 있을까? 서로에게 총을 겨누어야 했던 슬픈 역사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을 담았을까?
전투에서 끔찍하게 죽어간 가족과 친구들의 복수를 다짐하는 것을 설마 아니겠지? 느리게 이어지는 아잔은 모스타르의 허공을 배회하는 원혼들의 귀곡성이 실려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필자의 발칸여행에서 모스타르(Mostar)는 플리트비체국립공원이나 두브로부니크성에 비교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비극의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스타르시는 인구 113,169명(2013년 기준)이 살고 있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
공식적으로는 1452년에 세워졌다고 하지만, 네레트바강 주변의 훔(Hum)언덕과 벨레즈(Velz) 산 사이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해왔던 흔적이 있다. 또한 로마제국의 영토였다는 증거도 발견되었으며, 고대 후반에 지어진 성당을 계속 사용해왔지만 중세의 모스타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모스타르라는 이름이 공식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474년으로, 그 이전에는 네보즈사(Nebojša)와 신스키 그라드(Cimski grad)라고 하는 두 마을이 나무다리로 되고 있었다. 아드리아 해와 광석이 풍부한 중앙 보스니아 지역을 연결하는 무역로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 다리는 지키는 감시탑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다리 파수꾼’ 이라는 뜻의 ‘모스타리(mostari)’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하지만 1468년 오스만제국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다리에 있는 요새’라는 의미로 쾨프뤼히사(Köprühisar)라고 부른 적도 있다. 당시만 해도 마을 중심에 15가구가 모여 살고 있었다. 모스타르는 이내 지역의 중심지로 떠올라 1520년과 1566년 사이에 요새화되었고, 다리는 석재로 재건되었다.(1)
버스를 기다리며 숙소 주변을 돌아보는데 바로 앞에 있는 건물 2층은 비어있고, 창문도 떨어져 있다. 총탄자국이 남아 있는 건물도 있다. 내전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나보다. 숙소를 출발한 버스는 10여분을 가더니 성당 옆 공터에 일행을 내려주었다. 주변의 총탄 자국이 선명한 아파트와는 달리 페인트를 갓 칠한 것처럼 산뜻한 모습이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프란체스코교회이다.
이 교회는 1866년에 처음 세워졌지만, 1992년 내전기간 중에 완전히 파괴되어 2000년에 더 크게 새로 지었다고 한다. 성당을 지나 큰 도로를 건너가면 유대교 교회당 시나고그의 옛터를 만난다. 시나고그는 아직 복구를 하지 못하고 있나보다.
도로변에는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는데 간혹 폐허로 변한 가게가 방치되어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달아나버린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면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가이드말로는 내전의 흔적을 방치해둠으로써 다시는 그와 같은 짓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시나고그터를 지나면 무슬림들의 구시가지에 들어간다. 산이 좋고 숲이 우거진 탓인지 이곳저곳으로 맑은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던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까지 수십 년에 걸쳐 모스타르는 괄목할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당시 이슬람 사원, 마드라사(madrasah, 이슬람 교육기관)와 하맘(hammam, 공공 목욕탕)과 같은 종교 건물과 공공건물이 네레트바강 왼쪽 제방에 있는 쿨리아(Kullia, 종교단지)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
마하라스(mahalas, 주거지)와 바자르(bazar, 시장)에는 상업 건물과 개인주택들이 건설되었다. 반면 네레트바강 오른쪽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점령한 1878년을 기점으로 체계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엄격한 ‘론도(Rondo)’ 계획에 의하여 구불구불한 좁은 도로가 이어지는 가파른 언덕에 교역을 위한 개방 공간인 파자르(Pazar), 여가 지역인 메즈단(mejdan), 그리고 기도 공간인 무살라(musallah)가 유기적으로 배치되었다.(2)
납작납작한 옛날 집들이 늘어선 좁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다리가 나타난다. ‘옛다리’라는 의미의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다. 우리가 흔히 보는 다리와는 달리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는 독특한 모양이다. 요즘에는 교각을 아치형으로 세워도 길을 평탄하게 만드는데, 옛날에는 그런 기술이 없었나보다. 어떻든 다리의 오르막과 내리막 경사가 만만치 않은 탓에 미끄러지지 말라고 턱을 만들어 놓았다.
다리 끝에 있는 타라탑(Tara tower)는 감시탑으로 사용했던 것을 지금은 스타리 모스트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과 스타리 모스트에 관한 자료를 볼 수 있다. 다리를 건너가 가장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다리를 건너 좁은 골목길 양편으로는 말굽모양의 철문이 달린 집들이 이어지고 있어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 나오는 전형적인 아랍마을 같다. 길은 모스타르의 중심 브라체 페지카(Brace Fejica) 거리로 이어진다. 기념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우선 눈에 띈 장소는 강가에 있는 레스토랑이다. 마침 문을 열 준비를 하는 남자더러 잠시 들어가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안된단다. 장사를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인심 야박하다 투덜대지만 별 수 없다. 다행히 1618년 설립된 코스키메흐메트파샤 모스크(The Koski Mehmed Pasha´s Mosque) 입구에 스타리모스크의 베스트뷰를 볼 수 있다는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일단 들어가니 작은 정원에 몸을 씻을 수 있는 정자가 있고 작은 가게가 문을 열고 있다. 강가로 통하는 출입구가 있고 2.5유로의 입장료를 받는다는 표시가 있는데 사람이 없다. 아무도 없는 틈에 잠입하려는 순간 모스크로부터 한 남자가 나타났다. 슬며시 다가가서 잠시 들어갈 수 있는지 물었더니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다, 공짜로.
강가로 돌아가 다리를 보는 순간 절로 감탄사가 쏟아진다. 급하게 흐르는 네레트바 강 양편으로 굳게 내려진 교각에 기대어 슬쩍 등을 굽힌 듯 걸려있는 다리가 마치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처럼 아름답다. 지금 보니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나 보다.
스타리모스트는 1557년 안전이 의심되던 나무 현수교를 대체할 튼튼한 다리를 세우라는 오스만제국의 슐레이만대제의 명으로 짓기 시작하여 9년의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스만제국의 위대한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제자 미마르 하이루딘(Mimar Hayruddin)의 설계로 지어졌다.
스타리모스트는 20미터 높이에 28미터 길이의 스타리모스트를 건설하는데 30만 드람(Dram)이 들어갔다. 스타리모스트는 완공과 함께 유명해졌다. 17세기의 유명한 터키여행가 에브리야 체레비(Evliya Çelebi)는 “다리는 하늘로 떠오른 무지개처럼 이쪽 절벽에서 저쪽 절벽을 이었다. 알라의 비천한 노예인 나는 열여섯 나라를 여행해보았지만, 이렇듯 높은 다리를 본 적이 없다. 하늘처럼 까마득히 높은 바위 사이에 펼쳐졌다.”라고 적었다.(3)
스타리 모스트에서는 매년 7월 말 다리 아래로 뛰어내리는 다이빙대회가 열린다. 다리에서 네레트바강으로 처음 뛰어내린 것은 1664년이라고 하는데, 1968년부터는 공식대회가 열리고 있다. 네레트바강은 매우 차갑기 때문에 매우 위험해서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는 이른 아침이라서 볼 수 없었지만, 낮 시간에는 관광객으로부터 돈을 받고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4)
참고자료
(1) Wikipedia. Mostar.
(2) 문화재청. 세계유산. 모스타르 옛 시가지의 다리.
(3) Wikipedia. Stari Most.
(4) 오동석 지음. 크로아티아 여행바이블 310-320, 서영,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