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반에서 성희롱·성추행을 고발하는 미투(Me Too)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제약계에서도 미투 고발 사례가 나왔지만 여전히 다수는 침묵을 선택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성 영업사원들이 경험한 실제 사례를 들어 고발을 주저케 하는 갑을 관계와 대안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 주
<상> "미투운동 사각지대" 제약사 여성 영업사원의 그늘
"술 자리로 불러내 허벅지를 만졌다."
"여자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오자마자 바로 키스를 하려고 했다."
제약사에 근무하는 A씨, 다국적 제약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B씨가 겪은 일화다.
제약업계에서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정작 여성 영업사원들은 미투 운동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제품 디테일 환경 자체가 폐쇄된 공간에서 일 대 일로 만나야 하는 데다가 개인적인 만남 요구나 신체 접촉 등이 발생해도 고객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개인 차원의 고발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9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여성 영업사원 중 다수가 성희롱, 성추행과 관련된 경험을 했지만 미투 운동에 동참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
제약사에 근무하는 A씨는 수 년 전 모 학회와 공동 캠페인을 진행하다 얼굴을 붉혔다.
A 씨는 "건강관련 캠페인을 진행하고 뒤풀이 겸 회식을 했다"며 "잠시 화장실에 갔다가 나왔는데 당시 학회 관계자가 화장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나오자 마자 키스를 하려고 얼굴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며 "얼굴을 피하고 바로 자리를 떴지만 별다른 항의는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지속적으로 건강 캠페인을 요청해야 하는 '을'의 위치에서 성추행에 대해 항의하기 어렵고, 실제 항의로 이어진다고 해도 개인의 문제에서 회사 차원의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A씨는 침묵을 선택했다.
A씨는 "개인적인 유대감이 없이 일적으로만 알던 분이 이런 식으로 나와 당황했다"며 "업계의 여성 지인들에게 들어봐도 80% 정도는 비슷한 경험을 하지만 갑을 관계로 엮인 이상 쉽게 고발을 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다국적 제약사에서 근무하는 B씨 역시 불쾌한 경험을 했다. 특히 여성 영업사원의 입장에서 친목 도모나 디테일(제품 설명)을 빙자한 식사 요청을 거부하기 어렵다는 점을 교묘히 이용하는 사례가 많았다.
B 씨는 "몇몇의 경우 제품 디테일이나 친목 도모 등을 이유로 저녁 회식 자리에 불러낸다"며 "여러 명이 있는 술 자리에 배석해도 한 자리만 비워져 있어 그 특정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술을 따라주는 척 손을 잡거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건 양호한 편이다"며 "허벅지를 만지거나 노래방에서 포옹을 하는 등의 짓궂은 행동도 이어진다"고 밝혔다.
그는 "제품 설명을 위해 의사들과 일 대 일로 만나는 경우가 많은데, 진료실이나 연구실 모두 폐쇄된 공간이라 쉽게 터치가 일어날 수 있다"며 "제품 설명 과정에서 손을 잡는 등의 신체 접촉도 있다"고 귀띔했다.
갑-을로 얽힌 관계…"미투 꿈도 못꾼다"
여성 영업사원들이 미투 운동에 소극적인 이유는 직업적인 위계 관계가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
국내 제약사에 근무 중인 C씨는 "여성이라고 해도 의약정보담당자(MR)로서 발기부전 치료제와 같은 성 기능 제품 디테일도 해야만 한다"며 "그런 과정에서 의료진이 누구한테 발기부전 치료제를 선물해봤냐는 식의 성희롱에 가까운 농담을 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밤 늦게 혹은 주말에도 만나자는 연락이 오지만 대게는 (제품과 관련해) 물어볼 게 있는 핑계를 댄다"며 "이런 경우 영업사원 입장에서는 항의하거나 거부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성희롱, 성추행 가해자가 고객이라는 특수한 관계로 얽힌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고발은 어려워 진다"며 "고발을 한다는 건 거래처를 잃거나 심하면 일자리에서 물러날 각오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의료진들이 대체 가능한 처방약을 옵션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항의 후엔 처방액 감소 등 매출에 직격탄을 맞을 우려가 있다는 설명이다.
D 씨는 "섣불리 항의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의료진의 제품 설명 거부 불안감이 가장 크다"며 "공론화 했을 시 해당 의료진의 주변 의료진까지 가세해 버릇없는 사원으로 낙인 찍게되면 거래처뿐 아니라 전체 매출에도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그런 까닭에 술자리 호출이 있으면 남성 직장동료를 대동하는 수준으로 대응한다"며 "최근 여성 영업사원이 늘어나고 있지만 선배 세대들은 주로 남성들이고, 하소연을 해도 '나 땐 더했다'는 말로 무마시키기 때문에 회사 차원의 대응도 어렵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