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데 미투 운동이 불붙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당혹스런 장면이 머리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 년 전 일이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모 병원 교수가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취재 차 알게된 교수의 인상은 젠틀과 유머러스로 요약된다.
별다른 부담없이 식사 자리에 참석했다. 가볍게 반주도 곁들였다. 술이 조금 올라올 즈음 한 여성이 종종 걸음으로 뛰어들어왔다. 늦었다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교수는 그 여성을 외국계 제약사 영업사원으로 소개했다. 교수의 진면목은 반주가 무르익으면서 나타났다. 1차가 아쉽다며 2차를 거쳐 노래방까지 손을 잡아 끌었다.
젠틀하고 유머러스한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교수는 제약사 직원을 끌어앉고 블루스를 췄고, 여직원이 노래를 부를 땐 백허그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분위기 좀 띄워 보라"며 교수는 여 직원을 초면인 내게 떠넘기기까지 했다.
분위기에 휩쓸렸다. 교수를 제지하거나 여직원을 보호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수 년 전 일이다. 그렇게 기억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투 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미투 운동이 사회 전반으로 퍼지면서 아차 싶었다. 아니 뜨끔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적인 구도로만 그려지는 미투 운동에서 공범은 다름 아닌 침묵을 선택한 다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대학에서 만난 미국인 친구는 이해할 수 없는 한국 문화로 남녀간의 강압적인 위계와 이를 묵인하는 듯한 분위기를 꼽기도 했다.
그 친구는 "한국 드라마에선 화가 난 여성(애인)이 뒤돌아가버리면 남성이 계속 쫓아가거나 손목을 잡고 강제로 끌고가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고 신기해 했다.
자신의 나라에서 그랬다간 어디선가 그 장면을 지켜보던 '침묵하던 다수'로부터 신고가 들어간다는 말도 곁들였다.
미투운동에 과연 가해자-피해자만 있을까? 불미스런 일을 목격했던 다른 사람들의 존재는 없었던 걸까.
제약업계에서도 하나 둘씩 미투 사례를 폭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최근 퇴사와 함께 부적절한 사례를 고발한 외국계 Y 제약사 직원은 본인 및 일부 동료들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성추행 및 언어폭력 사례 등을 상세히 적었다.
성추행의 피해자로서 본인뿐 아니라 동료들이 겪었던 사례들을 고발하며 '불편한 침묵'과 '제3자 입장'에서의 방관을 더 이상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고발은 뜻깊다. 미투운동의 본질은 가해자(You)-피해자(Me)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조직 보호라는 미명 아래, 혹은 그들간의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다수가 있는 한 미투운동은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그렇기에 미투 운동은 너희들의 문제가 아닌 우리들의, '위투(We Too)운동'이 돼야 한다.
침묵이 무서운 이유는 간단하다. 침묵하는 다수는 공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