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초, 최대 기록을 이어가던 난임병원 거목들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졸지에 난민 신세가 된 환자들이 발을 구르고 있다.
그나마 산부인과의 버팀목이 되던 난임 분야마저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선택지가 극도로 좁아들고 있기 때문. 고난도 술기를 익힌 의료진은 많지만 플랫폼이 없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일 병원계에 따르면 지난해 경영난으로 법정 관리에 돌입한 제일병원에 이어 국내 난임 분야를 선도하던 강남미즈메디병원이 인수로 인해 난임 진료를 중단한 것으로 확인됐다.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은 "지난 15일부로 임정애 산부인과에 강남미즈메디병원 경영권을 인계했다"며 "앞으로 임정애 산부인과 체제로 난임 진료를 축소, 유전체 분석 등 차세대 산부인과 모델을 보여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아시아 최초, 최대 기록을 이어가던 제일병원에 이어 국내 난임분야에서 손꼽히던 강남미즈메디병원까지 난임 진료를 중단한 셈이다.
이로 인해 강남미즈메디병원에서 난임 진료를 진행하던 의료진들은 세브란스병원과 차병원 등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뜻이 맞는 의사끼리 공동 개원을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제일병원에서 난임 분야를 이끌던 교수 인력들이 상당 부분 차병원을 비롯해 서울권 대학병원으로 흡수된 것과 같은 수순이다.
이처럼 1년만에 국내 난임분야를 이끌던 두개의 거목들이 잇따라 무너지면서 아이를 소망하며 이들 병원에서 진료를 이어가던 난임 부부들은 큰 혼란에 빠져있다.
특히 일부 환자들은 제일병원의 경영 악화로 강남미즈메디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인수 절차로 인해 다시 병원을 옮겨야 하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로 인해 난임산모카페 등에서는 자신을 진료하던 의사들의 이동 계획과 진료 일정 등을 공유하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일부 환자들은 정자, 난자은행에 보관된 정자, 난자를 비롯해 동결된 배아 등을 이동하기 위해 발을 구르며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제일병원 출신의 A교수는 "단순히 진료 기록만 복사하면 되는 다른 질환과는 달리 난임 시술은 정자, 난자부터 수정란, 배아 등을 모두 이동해야 하는 절차가 동반된다"며 "고압산소탱크 등 장비가 동원된다는 점에서 이를 다 소비하기 전에는 병원을 옮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이어 "특히 난임시술은 오히려 날짜만 정해지면 되는 암 수술과는 달리 2~3개월에 걸친 사이클로 진료가 이뤄진다"며 "중간에 병원이 문을 닫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간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불안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이렇듯 산부인과의 마지막 버팀목이 되던 난임 분야가 왜 붕괴되고 있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출산율 감소와 더불어 급여적용에 대한 반작용이 크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난임과 불임에 대한 의료기술과 장비들은 크게 발전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에 반해 병원을 지탱해야 하는 환자수는 비례해서 늘지 않고 있는 이유라는 것이다.
제일병원 보직자 출신의 B교수는 "분만병원들이 출산율 감소에 직격타를 맞았듯 난임병원도 마찬가지"라며 "시대 흐름이 반드시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인식에서 굳이 난임 시술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마인드로 많이 바뀐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하지만 난임병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숙련된 의료진을 비롯해 배양하고 수정시키고 이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전문 인력과 그에 맞는 동결탱크 등 대규모 시설의 유지 보수가 필요하다"며 "여기에 비급여 시술이 급여권에 들어가면서 수익구조의 폭이 좁아져 인풋 대비 아웃풋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 놓인 것은 맞다"고 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