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대 본과2학년 강지형|왜 하필이면 여린 학생인 세일러문에게 지구를 구하라는 가혹한 사명이 주어졌냐는 질문에, 트위터의 한 현자는 "회사원들에게 세일러 전사의 사명을 맡겼다면 그 전사들이 앞장서서 지구를 파괴했을 거"라고 답한 바 있다. 이처럼 자기 인생의 주인공 노릇 하기도 벅찬 현대인들에게 지구를 구하는 것은 다소 버거울지도 모르나, 그들 역시 마음 한켠에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엄청난 일을 도모하고 싶은 꿈을 여전히 갖고 있을 것이다.
엑스칼리버를 뽑은 아서 왕, '포스의 균형을 가져올 자'라고 예언된 아나킨 스카이워커, 볼드모트를 무찌른 해리 포터, 디지몬과 함께 디지털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선택된 일곱 친구들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택받은 자(The Chosen One)'의 서사가 수없이 많은 반복과 변주를 거치면서도 사랑받은 것은 그 반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생각보다 정말 가까이에, 자신이 그 '선택받은 자'가 될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다. 바로 골수 이식을 위한 조혈모세포 기증 희망자 데이터베이스에 이름을 올려놓는 것이다. 가까운 헌혈 장소에 가서 신청서를 작성하고, 데이터베이스 등록을 위한 혈액 샘플 5mL를 채취한 뒤 연락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나중에 본인의 조혈모세포를 필요로 하는 환자가 등장하면 본인에게 연락이 오게 되는데, 이때 형편이 될 경우 며칠의 시간을 내 조혈모세포 기증을 할 수 있게 된다.
옛날에는 골수천자라고 해서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바늘을 갖고 엉덩이뼈에서 직접 골수를 채취해 기증자의 후유증이 심했지만, 이제는 일반 헌혈을 하듯 조혈모세포를 채취하는 기술이 생겨 기증자의 부담은 훨씬 줄어들었다. (자세한 절차 안내는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참고)
왜 조혈모세포 기증은 일반 헌혈과 달리 '선택받은 자'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의 면역학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 몸이 하나의 작은 나라라고 한다면, 면역계는 그 나라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겸 군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나라의 세포 시민들은 모두 주조직적합성복합체(MHC)라는 옷을 입고, 자신이 무엇을 보고 듣고 경험했는지 증언하고 다닌다. 면역계 군인들은 이런 세포 시민들을 시찰하다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를 보이는 세포가 있으면 가차없이 처단한다.
만약 이 나라에서 쿠데타(급성골수성백혈병)가 일어나는 등 모종의 이유로 군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내란을 진압해야 할 군인들이 내란을 일으켰으니 나라는 외세의 침략에도 무방비하고 내부적으로도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치료법이, 바로 문제가 되는 본국 군인들을 깡그리 쓸어버린 뒤 다른 나라의 군수 시설과 교관들을 들여와 거기서 양성한 군인들로 새로 나라를 지키는 조혈모세포 이식이다.
문제는 이렇게 수입해 온 외국 군인들은 원래 세포 시민들과 다른 옷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융통성 없기는 매한가지인 외국 군인들은 옷만 다를 뿐인 무고한 세포들도 수상한 자로 간주하고는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을 이식편대숙주반응(GvHD)이라고 칭하며, 환자 입장에서는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되므로 최대한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따라서 조혈모세포 이식을 해줄 때는 최대한 옷이 똑 같은 나라에서 군대를 모집한다.
이렇게만 들으면 흔히 알고 있는 수혈의 ABO 항원이 MHC로 바뀌었을 뿐이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MHC 항원 형태가 호환 가능하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각각 받은 HLA-A, HLA-B, HLA-C, HLA-DRB1, HLA-DQB1 등 10개 유전자의 조합이 거의 모두 일치해야 한다 (HLA 유전자는 MHC 분자 제작에 쓰인다).
문제는 HLA-B 유전자만 해도 변이형이 800개를 넘어가는 등, 인간의 HLA 유전자는 다형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형제의 경우에는 이 유전자 조합이 일치할 가능성이 그나마 높지만, 아예 모르는 사람과 우연히 이 모든 조합이 같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혈액형 종류가 800개나 된다면 알맞은 피를 확보하기가 얼마나 어려울지 상상해 보라. 이제 그와 비슷한 조건이 10개가 중첩된 상황을 상상해 보면, 알맞은 조혈모세포 기증자를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 조금 감이 올 것이다.
이처럼 HLA 유전자가 다양한 것은, 종 전체 수준에서 최대한 많은 종류의 MHC를 만들어 아무리 새로운 항원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인간 중 누군가는 그 항원에 반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이다. 이는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남는 데는 큰 도움이 됐겠지만, 현대에 장기 이식을 할 때는 매우 큰 장애물이 된다. 만약 형제 중에 이식 가능한 사람이 없으면, 환자와 의료진은 생판 모르는 사람들 중 HLA가 일치하는 누군가가 기증 의사를 밝혀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내가 조혈모세포 기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선택받은 자'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나의 HLA 조합이 일치했다는 건, 내가 최대한 많은 MHC를 만들어 내라는 진화의 압력을 뚫고 그 사람과 겹치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기증 희망 누적 등록자는 그 수가 30만을 훌쩍 넘기지만, 그동안 실제 이뤄진 수술은 7000여 건에 불과하다. HLA가 일치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조혈모세포 기증 희망 등록을 해놓는다 하더라도, 10년이 넘도록, 아니 어쩌면 평생토록 내 조혈모세포를 필요로 하는 환자는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등록자가 더 늘어날수록 일치하는 사람이 나타날 확률도 높아지며, 그렇게 일치하는 사람 한 명 한 명이 환자에게는 희망의 빛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조혈모세포 기증 희망 등록을 하지 않은 당신, 어쩌면 당신은 쿠데타로 신음하고 있는 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선택받은 자'일지도 모른다. 어떤가, 당신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그 이야기에 함께해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