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여기선 이래."
그릇된 일을 하는 친구나 가족을 나무랄 때 되돌아오는 답은 항상 같았다.
물론 내가 그 변명의 진위를 알기는 어렵다. 나는 인생의 절반을 해외에서 보냈기 때문에, 문화·정신적으로 겨우 '반쪽짜리 한국인'에 불과해서 그것이 정말 이곳의 특징인지는 모르고, 그것이 맞다면 부정하고 싶다. 하지만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나를 이방인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언짢았고, 현상을 핑계로 적당히 얼버무려 넘어가려는 시도가 싫었다.
2020년 3월 16일, 화학 대신 의학의 길을 걷고 싶어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의대를 진학하고 싶다고 가족에게 말씀드렸을 때, 의료 쪽에서 일하시는 작은아버지께서는 격려보다는 우려를 더 표하셨다.
"네가 여기 와서 의대 입시를 준비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조금 의아해했어. 여긴 네 성격이랑 정말 안 맞잖아. 이거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거 맞아?"
처음에는 작은아버지의 걱정을 웃어넘겼다. 하지만 이곳에서 시간을 오래 보낼수록 그분께서 무얼 경고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개방적인 나와 보수적인 가족들 사이에는 갈등이 잦았다. 곳곳에 있는 위계질서는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출하고 싶은 나를 억압했으며 "어디서 감히 훈계질이야?"라는 소리도 여러 번 들어봤다.
이런 갈등은 비단 한국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내게 큰 실망감을 안겨준 것은 바로 집단 내 침묵이었다.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성소수자 혐오를 목격해도 비판의 소리는 작았다. 명확한 증거 하나 없는 음모론을 친척이 주장하고 있는데도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인간 관계가 틀어지는 것이 두려워 침묵하고 있는 것인가? 오히려 더 소중한 사람일수록 방관은 더욱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다행히도 내가 경험한 부조리와 불합리는 그 규모가 작지만, 이따금씩 이곳에 있는 것이 맞는지 의문점이 들었다. 내가 이곳에 있으면, 결국 언젠가는 현실에 타협하지 않을까?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당당해질 수 있을까?
하지만 의대에 입학한 이후 나는 왜 내가 지금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내 인생 그 어느 때보다 명확히 깨달은 것 같다.
의학은 생명의 유지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학문이기 때문에 의대생의 침묵에는 가시적이고 불가역적인 결과가 따른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동조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과학적 양심과 윤리적 책임을 가장 우선시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한다. 침묵에 저항하는 것은 실제로도 효과가 있었다.
3월 말, 주변인들이 언론에 의해 심히 과장된 부작용 때문에 옥스포드-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지 않겠다고 했을 때, 나는 관련 논문과 발표를 인용하면서 백신의 실제 안전성과 효과성에 대해 설명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백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하나의 반대가 판을 바꾼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잘못된 체계를 고치려고 정책을 통과시키려 하셨던 한 의사 분, 의대생들에게 임상이 아닌 진로 기회가 많다는 것을 알리려는 선배들, 느린 실종 수색이 답답해서 스스로 한강에서 수색한 동기, 작년에 홀로 광화문에서 시위하던 친구...
모두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현상을 어떻게든 바꾸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이다. 내가 그들을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은 너무나 큰 행운이었고, 그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더 용기 낼 수 있다.
왜 내가 여기 있어야 하는지 더는 묻지 않는다. 이 사회에 분명 타파할 수 있는 부조리와 불합리가 존재하는 이상, 그리고 그걸 알고 노력하려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는 이상, 나는 이곳에서 변화를 함께 만들어갈 의무가 있다.
그래서 이제는 누가 내게 부조리를 두둔하기 위해 "원래 여기선 이래"라고 말한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