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부터 2010년까지 수차례 영업왕을 차지했던 국내 모 제약사 영업사원 A씨. 그는 최근 직장을 그만두고 타 업종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정부의 리베이트 규제 이후 잠재적 범죄자로 내몰리면서 직업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고, 이로 인해 자신에 대한 정체성 혼란이 왔기 때문이다.
그가 이직을 결심했을 때 주변의 만류는 심했다. 영업왕에 오를 정도면 그 직업은 천직이며,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심지어 배부른 소리한다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충고가 실체를 알지 못하는 이들의 막연한 부러움에 불과하다고 한숨지었다. 이 바닥이 얼마나 치열하고, 한심스러운지 그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A씨가 고백한 제약 영업사원의 세계를 들여다 봤다.
"회사에서 인정받은 것은 다름 아닌 의사 접대 능력"
지난 5년을 돌이켜보면, 나는 한마디로 가면을 쓰고 살았다. 실적내기에 급급한 나머지 의사들에게 온갖 향응과 편익을 제공했다.
간이고 쓸개도 빼줄 것처럼 행동했지만,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 생활로 돌아왔다. 한마디로 이중 생활을 한 것이다.
내 특기는 의사 접대다. 회사에서 인정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번의 접대를 위해 얼마나 많은 물밑작업이 필요한지 모른다.
음식점과 술집을 동시에 운영하는 곳을 찾아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는 술값 계산서를 음식점에서 가짜로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접대가 끝나면 나는 회사에 제출할 간이영수증을 쓴다. 대부분 술집에서 쓴 돈은 경양식 식사로 둔갑한다. 때문에 나는 만들지 않아 본 음식 세트가 없을 정도로 금액을 맞추는 데는 한마디로 도가 텄다.
오죽하면 영업사원이 아닌 경리사원이라는 말까지 들었을까. 헛웃음만 나온다.
카드깡은 기본이다. 현금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술값이 100만원이면 150만원으로 결제한 후 차액 중 일부는 단골집에 수수료 명목으로 떼어준다. 그리고 나머지는 현금화한다. 이래야 2차를 원하는 의사들을 접대할 수 있다.
만약 카드깡을 못해 개인카드를 긁게 되면 사유서를 쓰면 된다.
하지만 방법은 복잡하다.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생돈을 날리는 것이다. 때문에 간이영수증 조작에는 신중에 신중을 가한다. 영수증에는 사업자명, 인감 등이 있어야 인정된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이름으로 도장도 파봤다.
어찌보면 나는 회사의 꼭두각시다. 실적을 올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회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 것이다.
처음에는 실적이 좋으니 인센티브 등으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욕심은 욕심을 낳는다고 했던가. 더 높은 실적을 위해 개인 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부작용이 났고, 본전 생각에, 막연한 불안감과 조바심에 휩싸였다.
쌍벌제 이후 실적도 곤두박질 치고 있다.
이제 이 생활이 지겹다. 회사에서 인정 받았지만 내 자신이 더 이상 변해가는 것이 싫었다.
정부의 대대적인 리베이트 단속도 부담스럽다. 어느 순간 사회는 나를 잠재적 범죄자로 단정지었다. 뭔가 쫓기는 느낌이다.
이런 상황 속에 일부 제약사들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정장 대신 청바지를 입고 영업을 한다. 무장공비가 따로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한 때 제약 영업하면 나름 괜찮은 직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곪을대로 곪았다. 하지만 회사는 여전히 실적 좋은 영업사원을 좋아한다.
회사가 원하는 인간이 되려면 또 가면이 필요하다. 내가 5년간 몸 담은 이곳을 떠나게 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