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한 복지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의 역사를 돌아보면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2000년 의약분업이 시작되면서 건강보험 재정에 빨간불이 켜졌다.
2001년 건강보험 순적자가 약 2조원에 육박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자 국회는 복지부가 제출한 건강보험 재정건전화특별법안을 의결했다.
2002년 1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재정건전화특별법은 제3조에서 건정심을 두도록 명시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건정심은 ▲요양급여기준 ▲요양급여비용 ▲보험료 ▲건강보험에 관한 주요 사항을 심의 의결한다.
위원은 보건복지부차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가입자 대표 8인, 의약계 대표 8인, 공익 대표 8인으로 정했다. 위원은 복지부장관이 임명 또는 위촉한다.
특별법 제4조는 가입자 대표로 근로자단체 및 사용자단체 2인씩, 시민단체, 소비자단체, 농어업인단체, 자영자단체 각 1인이 참여하고, 공익 대표의 경우 중앙행정기관 2급 이상 공무원, 공단, 심평원, 건강보험 전문가 4인으로 규정했다.
특별법은 건강보험 재정 적자를 조기 해소하기 위해 구성됐고, 건정심은 이러한 목적에 충실했다.
건정심은 겉으로는 가입자대표 8인, 공급자대표 8인, 공익대표 8인으로 황금 분할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건정심은 유감스럽게도 시행 첫해부터 폐지 논란에 휩싸였다.
1999년 12월 31일 제정된 건강보험법에 따르면 요양급여비용(수가)은 공단 이사장과 의약계 대표의 계약으로 정한다.
하지만 한번도 공단과 의약계 대표간 협상다운 협상이 이뤄지지 않았고, 협상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건정심에서 수가가 결정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2002년 3월 당시 건강보험료 6.7% 인상안과 수가 2.9% 인하안이 건정심에 상정되자 경총,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 7개 가입자대표들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더니 그해 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전국농민단체연합회는 건정심 탈퇴를 선언했다. 더 이상 정부 정책의 거수기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의약계 대표 6인이 건정심에서 2014년도 수가안이 표결에 붙여지자 회의장을 떠났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가입자대표 2인도 이날 회의에 불참했다. 공급자대표들은 수가에, 가입자대표는 보험료 인상에 불만을 드러낸 결과다.
공익대표 중립성 논란 매년 도마
2003년 12월 의협은 수가 계약을 거부하겠다며 건정심 탈퇴를 선언하고 나섰다.
의협은 "건정심 위원을 건강보험 및 보건의료에 관한 전문성과 공정성을 지닌 인사로 구성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공익대표 8인 중 4인이 관계 공무원으로 구성돼 있고, 수가 조정 등 주요사항을 최종 의결하는 단계에서 공익대표 8인과 가입자대표 8인이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어 정부 또는 가입자 위주의 정책 결정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의협은 "건정심 수가결정 과정에서 공익대표가 공정성을 상실한 채 보험재정 절감 등에 치우친 수가조정안을 제시해 왔다"며 "건정심은 의료계 안을 배제한 채 공익대표 안을 상정해 일괄 표결 처리하는 극히 비민주적으로 진행했다"고 꼬집었다.
공익대표를 학계, 종교계, 언론계 등 중립적인 위원으로 조정해 공정성과 조정·중재기능을 수행토록 해야 한다는 게 의협 입장이었다.
건정심은 수가 외에 건강보험 재정 안정을 위해 초재진료 산정기준 개정과 같은 비상식적인 조치도 취했다. 동일 환자가 진료를 받던 중 다른 상병으로 내원할 때 재진료를 청구토록 한 것이다.
이와 관련 재미 있는 일화도 있다. 2003년 공단 이성재 이사장이 취임하자 김재정 의협회장이 인사차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김재정 회장은 이성재 이사장에게 "환자가 진료를 받던 중 다른 상병으로 내원하면 초진입니까, 재진입니까"라고 대뜸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이성재 이사장은 "초진 아니냐"고 답변했다.
초재진료 산정기준 개정은 재정 안정을 위한 극단적인 조치였지만 아직까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2008년부터 요양기관 종별 유형별 수가 계약이 시작되면서 건정심은 더욱 복잡한 이해관계에 놓이게 되고, 협상 결렬에 따른 페널티를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2007년 10월 의협과 병협은 공단과의 수가 협상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건정심으로 넘어갔고, 결국 건정심은 공익대표가 제시한 의원 2.3%, 병원 1.5% 인상안을 의결했다.
의협과 병협 대표는 공익대표 인상안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중간에 퇴장했다.
건정심은 통상 공익대표들이 제시한 수가안을 의결했고, 공익대표는 복지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무엇보다 공익대표들은 공단과의 수가 협상 당시 공단이 제시한 수준에서 중재안을 제시해 의료계의 표적이 됐다.
2008년에도 의협은 공단과 수가협상에서 타결을 보는데 실패했다. 그러자 공단 재정운영위원회는 수가협상 결렬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의협이 건정심에서 최저 수치를 받도록 건의하고 나섰다.
건정심에서 수가협상 결렬에 대한 책임을 물어 2% 미만의 인상을 주장하는 가입자단체와 2.5% 인상을 주장하는 공급자단체가 충돌했고, 공익위원들이 제시한 2.1% 수가인상안이 통과됐다.
2009년 역시 의협과 병협의 수가는 건정심에서 결정됐다.
복지부, 감사원 지적 버티기…공은 국회로
복지부는 2010년에는 눈에 가시와 같았던 경실련과 농민단체협의회를 건정심에서 전격 퇴출시키면서 건정심 친정체제를 더욱 공고히 해 나갔다.
그러자 2010년 10월 정하균 의원은 공단 국정감사에서 매년 공단과 의약단체간 수가협상이 결렬되는 것은 의약단체에 패널티를 주는 관행 때문이라고 질타했다.
정 의원은 "지난 10년간 수가협상에서 단 한번만 공단과의 계약에 의해 이루어졌을 뿐 나머지 9번은 건정심에서 결정됐다"면서 "공단이 수가계약을 하지 않고 건정심에 넘기면 페널티로 수가인상률을 낮추는 관행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병협은 건정심 페널티가 무서워 2010년 10월 공단과 1% 인상안에 도장을 찍기까지 했다.
급기야 의협은 노환규 회장이 취임한 직후인 2012년 5월 24일 건정심이 포괄수가제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며 전격 탈퇴를 선언했다.
특히 새누리당 박인숙 의원은 지난해 12월 31일 정부 및 가입자 5인, 공급자 5인 동수와 정부 및 가입자 추천 1명, 공급자 추천 1명으로 공익위원을 구성할 것을 골자로 한 건강보험법 개정안을 발의하기에 이르렀다.
복지부는 2004년 감사원이 건정심 공익대표의 편향성 등을 문제 삼아 제도를 개선하라고 요구했지만 묵살했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간 셈이다.
의협 의료정책연구소 이평수 연구위원은 "그간 건정심은 근거를 기초로 한 타협보다는 힘에 의한 다수결 처리에 의존해 왔고, 수가협상이 결렬되면 공급자단체에 페널티를 부여하는 등 문제점을 노출해 왔다"고 환기시켰다.
이에 따라 이 연구위원은 "건정심 의사결정 구조와 과정을 개선하기 위해 법령 정비가 필요하다"고 못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