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70세도 넘어 보이는 할머니는 김모 교수 회진 내내 주변을 서성였다.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하자 쭉 병원에 머물렀던 보호자였다. 회진을 마친 김 교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김 교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 할머니는 그의 손에 3만원을 쥐어줬다. 얼마나 오래 쥐고 있었던지 돈이 꼬깃꼬깃 했다.
"우리 아들 살려줘서 너무 고마워. 몇푼 안되지만 받아줘"라며 눈시울을 붉히는 할머니의 모습에 김 교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속으로 '아, 의사 되길 잘 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2. 박모 교수는 회진을 돌다가 퇴원을 앞둔 환자 보호자로부터 양말 셋트를 받았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선물을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당직을 서느라 집에도 못 가고 있는 레지던트에게 건넸다.
그런데 몇 시간 뒤 레지던트가 양말 케이스에 봉투가 있다며 찾아왔다. 확인해 보니 봉투에는 20만원과 함께 감사의 글이 적힌 쪽지가 들어있었다.
박 교수는 쭈뼛대며 양말을 건네던 환자 보호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봉투를 가져온 레지던트에게 의국 회식비로 쓰라고 돈을 건넸다.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3. 20대 청년이 감기에 걸렸다며 이모 원장을 찾아왔다. 그는 8살 때부터 감기에 걸리면 이 원장을 찾아왔다. 이 원장이 몇년 전 인천에서 서울로 병원을 옮겼지만 이 청년은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서울까지 찾아왔다.
이 원장은 왜 굳이 서울까지 왔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선생님한테 치료를 받아야 금방 나을 것 같아서요"라며 웃을 뿐이었다. 이 원장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더 성심껏 진료해야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14년 전, 정확히 2000년도 무렵만 해도 의사와 환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신뢰' '존경' 이라는 단어 쯤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감정들 말이다.
환자는 의사가 하는 말을 절대적으로 믿었고, 질병을 치료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때만 해도 '촌지'는 감사의 표시였다. 일부 큰 수술을 받은 환자들 중에는 촌지를 주지 않고 퇴원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할 정도였다고 말하면 믿을까.
하지만 요즘은 촌지를 받는 의사도, 주는 환자도 불편해졌다. 2014년 의사와 환자는 신뢰보다는 철저한 계약관계에 있다.
환자는 정당한 권리를 넘어 높은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요구하고,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 병원 홈페이지에 자신의 불만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박모 교수(모 대학병원 정형외과 과장)는 요즘 한달 걸러 한번씩 환자들의 민원을 처리하느라 바쁘다. 언제 어떤 내용의 글이 병원 홈페이지에 올라올 지 모르기 때문에 늘 조심스럽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한참 환자에게 검사 결과를 설명하던 중 갑자기 환자가 "잠시만요. 녹음 좀 할게요"라며 휴대폰을 그의 앞에 들이 밀었다.
박 교수도 그 환자가 나쁜 의도가 있어서 녹음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감시받는다는 생각에 상당히 불쾌했다. 그 순간 '이렇게까지 해서 진료를 계속 해야하나'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엑스레이 등 검사결과를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가는 일도 다반사이고, 간혹 별다른 이유없이 차트를 복사해달라는 환자도 있다.
조모 교수는 요즘 환자들의 질문공세에 굉장히 피곤하다. 인터넷을 통해 여러가지 지식과 정보를 접하고 온 환자들은 모든 것을 쏟아내며 의사를 평가하는 것 같다.
그 질문공세를 통과하면 그 때서야 '내 몸을 맡겨도 되겠군'하며 의사로 봐준다. 처음엔 불쾌했지만 어느새 환자들의 테스트에 익숙해져가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곤 한다.
2014년 지금 의사들은 2000년도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