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원리 중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말이 있다. 14세기 영국 논리학자이며 프란체스코회 수사였던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에서 따온 말인데,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세우지 말고 가능한 간단하게 설명하라는 것이다.
예컨대, 어느 날 아침 집 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죽어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대개의 경우 질병이나 사고로 생명이 다 한 고양이가 죽어있는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이걸 두고 '누군가 나에게 저주를 내리기 위해 고양이를 죽여 집 앞에 던져두고 갔다'는 가정을 한다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 가능성이 희박한 가정을 한다면 현상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고, 그 결과 역시 바람직하지 않게 흐를 가능성이 높다.
그럼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이나 가능성이 떨어지는 설명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그것이 순수한 가정이나 창의적인 설명일 수도 있지만, 그 중 다수는 대중이 진실에 접근하기 어렵게 하려 하거나 또는 사건의 이해 당사자가 사실대로 설명을 하기 곤혹스러운 경우일 것이다.
최근 대한의사협회는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조정실장으로 임명된 이 모 교수 때문에 홍역을 치르고 있다. 그가 지난 십여 년 동안 대다수 의사들의 정서에 반하는 주장을 거듭 해왔고 또 협회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를 해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그는 의약분업 강제 시행 이후 파탄 난 건강보험 재정의 원인이 의료수가를 대폭 올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협회의 당연지정제 소송이나 건보공단 재정통합 소송에 반대하였으며, 대다수 의료기관들을 파산으로 내모는 총액계약제 등을 주장해왔다.
더욱 큰 문제는, 여기에 대한 집행부의 변명이 매우 옹색하다는 것이다. 협회는 이 교수의 생각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고 차후 협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인사권자인 회장에게서는 이렇다 할 해명이 없다.
회원들 역시 오랜 기간 동안 대다수 의사들의 권익에 반하는 언행을 지속해왔던 이 교수나 그의 후원자인 김용익 의원이 갑자기 달라져서 협회나 의사들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해줄 것이라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의 말이 아니라 행동에 의해 평가받기 마련인데, 그들이 그동안 해왔던 행적은 의사들이 도저히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협회가 회원 수십 명의 친목회도 아니고 무릇 10만 의사들을 대표하는 공식 단체라면 임기 초부터 불거진 인사사고 논란에 보다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것 역시 불필요한 가정이나 가능성 떨어지는 설명은 배제해야 한다.
그 해명이 진실에 접근할수록 회원들이 논란 많은 인사에 대해 찬반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된다. '말 못할 사정이 있다'거나 '나중에 두고 보면 안다'는 식의 해명은 회원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