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도시로 다니며 일류 호텔에 투숙하고 비싼 음식을 매식하며 여행사 깃발을 따라다니거나 면세점이나 명소 입구에서 고작 기념사진이나 찍어오는 그런 패키지투어는 여행이 아니다. 그건 오락이요, 낭비다. 안전만을 찾고 편리함만을 바라는 호사스런 여심은 골프장을 즐기는 사치스런 심정과 별반 다름이 없다"라고 전규태 교수는 그의 저서 '단테처럼 여행하기'에서 잘라 말했다.
하지만 여행사의 상품을 이용한 여행도 분명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위험 없는 소득이 어디있겠느냐고 볼멘 소리를 할 지 모르나 나이가 들면 첫째도 안전이요, 둘째도 안전이다. 필자가 여행사 상품으로 여행을 이어가는 이유다.
이번에 터키를 여행지로 고른 이유는 지난 해 스페인여행에 이은 이슬람 이해하기의 속편이다. 유럽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충돌하였던 혹은 충돌하고 있는 현장을 직접 살펴보기 위한 여행인 것이다. 터키 여행을 준비하면서 먼저 다녀온 사람들이 쓴 다양한 여행기는 물론 터키의 역사와 이슬람문화에 대하여 나름대로 공부를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공부할 것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여행기를 쓰는 동안 더 공부를 할 예정이다.
터키 여행은 봄에 떠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큰 아이의 입대와 장인어른의 병세가 갑자기 나빠지는 바람에 여기까지 미루게 된 것이다. 이번 일정도 어렵게 만든 것인데, 예약금을 미리 지불해야 하는 되고, 예약을 취소하는 경우에 위약금을 물어야 하는 것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어 잡은 일정에 따라서 떠나기로 한 것이다. 훌쩍 떠나면 될 것 같은 여행이지만 쉽지 않은 것은 아마도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정들을 고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정은길은 '나는 더 이상 여행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라고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 자신이 아시아를 정복할 사람임을 증명한 고사를 배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보니 이 고사의 매듭을 만든 고르디우스가 다스리던 프리기아가 바로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방에 있었다.
집을 나서는데 잔뜩 찌푸린 하늘이 금세 소나기를 쏟아낼 것 만 같다. 새벽부터 천둥과 번개가 예고되어서 출발부터 힘든 여정이 되지 않을까 걱정 속에 잠들었지만 다행히 공항버스를 탈 때까지는 하늘이 참아주었다. 참 다행이다.
버스가 정류장에 설 때 마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든 사람들이 속속 올라탄다. 출장을 떠나는 듯한 교수도 있고, 여행을 떠나는 듯한 가족도 있다. 차가 올림픽대로에 들어서기 전 마지막 정류소인 신사동에 이르렀을 때 버스는 거의 만원이 되었다. 아무래도 주말이라서 출국하는 사람이 많은가보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면서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하던 작은 아이에게 조금은 미안하다. 일주일 동안 혼자 지내려면 아무래도 불편할 테니 말이다 그래도 잘 지낼 것이라고 믿는다.
쿠르드족 분리운동 등 터키 국내분위기도 뒤숭숭한 가운데 떠나는 여행이라서 다소 불안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누구나처럼 설마 나에게 무슨 일이 있겠나하는 자기 최면을 걸어 본다. 버스가 올림픽대로에 들어서면서 세찬 비가 창문을 베기 시작한다. 11시 미팅시간인데도 충분히 일찍 집을 나선 보람이 있다. 빗속에 여행가방을 끌어야 하는 불편함을 피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김포평야를 지날 무렵에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논에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가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벌써 가을이다. 쉴레이만 세이다가 쓴 <터키 민족 2천년 사>를 꺼내 든다. 옆자리의 아내도 책을 꺼내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을 접고 잠이 든다. 어제 저녁 늦게 들어온 작은 아이를 기다리느라 잠을 설친 모양이다. 아이들이 커도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시선이 자꾸 창밖으로 향한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휴대폰 로밍신고도 하고, 미팅장소에서 항공권과 함께 여행에 관한 안내를 받았다. 인솔자가 없으니 이스탄불까지는 알아서 가야한다.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대한항공 회원카드를 이용해서 간편하게 탑승수속을 마쳤다. 내친 김에 대한항공 라운지도 이용했다. 국적기로 여행하는데 따른 프리미엄이다. 4층에 있는 라운지의 창가 좌석에 앉으니 게이트에서 출발을 기다리는 비행기가 내려다보인다. 이따금 견인차량에 끌려서 게이트를 벗어나는 비행기를 보면 저 비행기는 어디로 가는 걸까 궁금해진다. 일상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늘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향이 진한 아메리카노 한잔이 정신을 맑게 한다. 여행사에서 준 여행안내서와 일정표 등을 살펴본다. 짧은 일정이라고 해도 터키에서 꼭 보아야 할 것들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 빠진 듯 아쉽다. 우리는 7박9일의 일정으로 터키의 서쪽 반을 돌아보는 여행이다. 도착한 날 이스탄불에서 자고, 이튿날 샤프란볼루를 거쳐서 앙카라까지 가서 잘 예정이다.
그리고 카파도키아에서 선택관광으로 다양한 체험활동을 하고서 묵게 된다. 다음날에는 오후 내내 이동하여 안탈리아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에는 파묵칼레에서 잠을 자게 된다. 그리고는 에페소를 거쳐 이즈미르에서 잠을 잔 다음에는 비행기편으로 이스탄불로 이동하여 마지막 밤을 보낼 예정이다.
탑승시간에 게이트에 줄을 서던 버릇도 버렸다 짐칸에 넣을 큰 짐이 없으니 느지막하게 들어가서 정해진 자리에 앉으면 되는 거다. 자리에 앉고 보니 또 날개 위다. 참 지겨운 징크스다. 창가자리를 택했을 때는 유독 날개인 경우가 많다. 통로 쪽을 달래기를 참 잘했다. 화장실 갈 때 미안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탑승하고 얼마 되지 않아 기내식이 나왔다. 여행사 안내문에는 점심이 제공된다는 이야기가 없었다. 라운지에서 충분히 요기를 했는데 점심을 먹어야 되니 곤혹스럽다. 그렇다고 거르면 안 될 것 같아 샐러드 메뉴를 골라 부담을 줄였는데도 배가 탁자에 닿을 지경이다.
비행기는 정시에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게이트를 빠져 나가는데 열기가 훅 끼쳐온다. 터키 북부에 있는 트라브존이 백두산과 같은 위도에 위치하고 남부에 있는 안탈리아가 해남과 같은 위도에 위치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날씨와 흡사하다고 들었는데 웬일인가 싶다.
입국장에 들어서니 마침 도착한 항공기가 많은지 입국심사대 앞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 서있다. 터키 사람들이 친절하고 오지랖이 넓다고 들었는데 입국심사관은 인사도 받지 않고 무뚝뚝하다. 연간 터키를 찾는 관광객이 1000만명이나 되고 우리나라에서 오는 관광객도 30만이나 된다는데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입국수속은 우리나라처럼 여권을 제출하는 것으로 끝나는 신속프로그램이라서 줄은 길었지만 금새 끝났다. 오늘도 중국여권을 가진 젊은이가 슬그머니 새치기하는 꼴을 보았다. 그들의 속성을 알고는 따져 물을 수가 없어서 모른척하고 말았다. 입국절차는 쉬웠지만 가이드를 찾느라 애를 조금 먹었다. 드디어 터키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