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촉촉하게 맺힌 눈가 아래로 잔잔한 미소가 배어 나온다. 내가 잠시나마 잊고 살았던 참으로 짠하고 가슴시린 미소였다. 꼭 쥐고 놓지 못하던, 핸드폰을 든 오른손은 가느다랗게 떨리는 듯했다. 전화기 속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아빠는 왜 이상한 전화를 받고 그래요!”
난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다. 세월을 말해 주듯 깊게 패인 주름이 같이 우는 듯, 웃는 듯. 2시간동안의 격정이 해소되는 순간이다. 그는 나의 장인어른이다. 칠순을 바로 3일 앞둔 날..
이른 아침, 평소와 다르게 전화도 급히 울리는 듯하다. 처남이 납치됐다. 충분히 상기된 장모님의 목소리다. 급히 처가로 향했다. 처남과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온몸이 떨려온다. 그순간 장인어른은 핸드폰을 붙잡고 절규하고 있다. 목소리는 차분하려 애쓰고 있지만 온몸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는 울부짐 그 자체다.
‘말이 안 통하는 XX, 손목을 잘라’ ‘악, 악, 아버지, 저 사람들 얘기대로 해요.’
지옥의 한가운데에 섰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애써 침착하려 해도 방법이 없다. 핸드폰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 고함, 욕설에 맞춰 내 온몸은 전율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 장인어른이 섰다. 곧 처남을 구하러 간다. 그들이 요구하는 돈의 일부라도 마련하여 어떻게든 처남을 찾아야겠다.
“아! 목사님!!” 복음이 울린다. 정말 갑작스런 전화였다. 그리고 목사님 곁에서 봉사 중이었던 처남과 연락이 닿았다. 드디어.. 두시간여, 아비규환의 지옥에서 헤어 나오는 순간이다. 눈가가 사정없이 떨려온다. 장인어른은 곧 부서질 소금인형처럼 움직임이 없다.
세상일, 겪어 보기 전에는 진짜 모른다. 말로만 듣던 일이 나에게도...
3일후, 자그마한 케잌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아가들은 외할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한다면서도 눈은 케잌만을 향하고 있다. 장인어른은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우리가 뭘 이뤄서가, 뭘 가져서가 아니다. 단지 건강히 옆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또한 삶을 바라보는, 미래를 생각하는 기준 자체가 변해버린 돌이켜 보면 고마운(?) 순간이었다. 백만분의 일이나 될까? 내가 이해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가들을 키우다 보니 자연스레 어른들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힌다.
수년전, 진짜 오래전처럼 느껴진다. 겨울. 지독히도 추운 날이었다. 병원 로비에서 어머니와 마주쳤다. 우연히.. 깜짝 놀랐다. (내가 친엄마를 보고 놀라다니..)
집에 가지 못한지 40일쯤 지났던 날, 어머니는 아들을 보겠다고 연락도 없이 무작정 큰 병원 로비를 서성이고 계셨다. 나는 짜증을 넘어서 버럭 화만 냈다. 그리고 왜 이리 바보처럼 계시냐고 어머니를 몰아 세웠다.
말없이 내 볼을 쓰다듬는다. 그냥 얼굴만 보고 싶었다며.. “전화 할께요.” 바쁘다고 그리고 추운데 빨리 집으로 가시라고, 연신 화만 냈다.
제 몸도 살피기 힘들던 시절, 며칠이 지났을까.. 어머니께서 로비에서 급히 주고 가셨던 글을 그제서야 열어 봤다. 어머니가 아는 지인 중 한분이 응급실 간호사였다. 마침 근무 중에 술에 취한 환자에게 구타당하는 나를 본 것이다. (내가 근무했던 국립중앙의료원은 신원 불상의 환자들이 참 많았다. 술에 취해 경찰차에 실려 온 불상자들이 넘치는 병원이었고 의료진은 늘 위협 속에서 고된 근무를 이어 나가야 했다. 공공의료의 슬픈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봐야만 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어머니께..
그냥 내가 잘 있는지가 궁금했을 것이다. 아니 절실했을 것이다. 나는 그때 반갑게 그리고 따뜻이 어머니를 안았어야 했다.
1층 로비, 해외진료센터 앞 간호사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한다. “선생님 어머니셨어요. 8시인가? 아침부터 오셔서 해외여행 접종 때문에 오셨냐고 물었더니, 아니라며 씩 웃고만 가시더라구요. 그리고 계속 로비만 서성이시고. 그냥 좀 이상한 분인지 알았는데..”
그날 내가 어머니를 만난 시간은 오후 5시 즈음이었다.
이번 칼럼은 호외다. (an extra,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기적으로 펴내는 호수 이외에 임시로 펴낸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