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방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공간이 하나 있다. 병원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나 의학 드라마, 영화에서도 쉬이 허락하지 않는 공간이 있으니 바로 '마취과'의 공간이다. 수술대가 수술장의 무대라면 마취과의 공간은 그 무대 뒤에서 수술이란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게 갖가지 장치로 조율하는 곳이다. 수술을 하는 분과는 일반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이비인후과, 성형외과 등으로 많지만 마취과는 하나의 분과로만 이루어져 있다.
나는 수술대에서 방포로 텐팅Tenting 되어 있는 건너편 마취과의 공간이 늘 궁금했다. 본과 4학년이 되어 마취과 실습에 이르러서야 겨우 그 공간에 입장하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그곳만큼 수술 전체가 잘 보이는 위치가 없었다. 수술실의 전망대 격인 마취과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수술실 풍경은 새로웠다.
서젼이 수술대라는 무대 중앙에 위치하여 수술 부위에 집중한다면 마취과 의사는 환자의 머리맡에서 환자의 생체 징후를 알려주는 기계의 수치들을 조율하며 그 무대의 전 과정을 지켜본다. 나는 인턴 중반기에 들어섰을 때 마취과 인턴으로 그 공간에 다시금 들어설 수 있었다.
마취의 기원
마취학 교과서에 나오는 마취과 역사에 대해 읽게 되었다. 모든 의학 저서들이 그렇듯 첫 장에 나오는 설명은 흥미로웠다. 마취Anesthesia는 그리스어로 '없음'을 뜻하는 'an'과 '감각'을 의미하는 'aisthesis'의 복합어가 그 기원이다.
1세기경 그리스의 디오스코리데스가 환자에게 만드라고라의 뿌리로 만든 와인을 마시게 한 후 통증없이 수술을 했는데 이러한 최면 상태를 'anesthesia'라고 명명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후에 1724년 베일리Bailey의 영어사전은 초기 의미를 차용하여 마취를 '감각의 결함'이라 정의내렸다.
『삼국지』의 명의 '화타'도 삭골이란 수술을 할 때 마비산을 환자에게 복용시켜 통증을 완화시키고 평소에도 진통 작용이 있는 약물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현대 마취 기술이 도입되기 전까지 외과 수술을 받아야 했던 환자들은 극심한 통증과 불길한 기억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 외과 의사의 자질은 '어떻게 하면 최대한 빠르게 수술을 끝내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들이 전해지는데, 90초 만에 하지 절단술을 끝냈다는 의사 제임스 심의 기록이나, 수술하는 동안 메스를 입에 문 채 양손을 모두 써서 수술했다는 로버트 리스톤의 기록들은 황당하기만 하다.
근대에 들어서 '에테르Ether'가 흡입 마취제로 등장했다. 이를 시작으로 환자들은 수술 도중 겪는 극심한 통증과 공포스러운 기억에서 점차 해방되었다.
내가 침대에 눕자 흰 삼배 손수건이 내 얼굴 위에 덮어졌다. 그 후 7명의 남자와 간호사가 내가 누워 있던 침대를 에워쌌다. 나는 수건 사이로 강철 칼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불빛을 봤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얼마나 무서운 순간이었는지. 무시무시한 칼이 가슴을 파고들어 왔을 때 나는 고함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술이 진행되는 내내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웠는지 수술이 끝났는데도 끝난지도 모른 채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마취 없이 유방절제술을 받았던 소설가 패니 버니의 경험담을 읽으니 섬뜩하다. 주사 좀 놓으려고 하면 호들갑을 떨었던 환자들 때문에 진땀 빼는 우리들이 생각났다. 당시 수술했던 의사나 수술 받았던 환자들이나 모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취 과학의 발달이 없었다면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여러 수술, 특히 암 수술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간이식과 같은 장기이식 분야의 발전 또한 지지부진 했을 것이다. 멀쩡히 깨어 있는 환자의 장기를 조심스럽게 꺼내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현재 마취제의 종류는 무궁무진하고 각각의 용도도 다르다. 환자가 수술 받을 때의 고통을 줄여주는 진통제와 의식을 소실시켜 수술 중의 불필요한 기억을 없애는 약물, 수술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한 근육 이완제가 있다. 뿐만 아니라 마취 중간에 생체징후 감시를 통해 혈압조절과 전해질 균형을 위해 사용하는 약물도 있다.
마취과 의사는 여객기 조종사와 비슷하다. 수술 때문에 긴장되어 있는 환자를 안정시키고 편하게 마취를 유도한다. 수술 도중 환자가 안정적인 상태를 이루게 하고 서젼이 편하게 수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수술이 끝나고 환자가 안전하게 마취에서 깨어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전 과정. 이 과정이 비행처럼 느껴졌다. 매끄럽고 안전하게 이륙하고 착륙할 때도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도록 하는 비행기 조종사의 모습 말이다.
앞으로 4시간 동안의 수술 여정으로 여러분을 안전하게 모실 마취과 ○○○기장입니다. 환자는 58세 남자로 혈압은 115에 80, 맥박은 86회, 호흡은 18회, 체온은 36.2도로 안정적이며 특이 기저 질환 없는 분으로 안전한 수술이 예상됩니다. 환자와 의사, 간호사 등 탑승객 여러분 모두 매끄럽고 안전한 수술로 모시겠습니다. 이상 징후 발견 시 알려드릴테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기장이 기내 방송을 하는 것처럼 수술 장면을 상상해본다. 물론 실제 마취과 선생님들이 이렇게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총 64개의 수술실에서 수술 일정이 가득하게 돌아가는 병원의 마취과 인턴은 선생님을 보조하는 것이 대부분의 일이다. 이제 한 달 동안 환자들의 안전한 수술 여정을 떠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