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소위 직업 충성도가 가장 높은 직업군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의사가 진료현장을 떠나 타 직종으로 진출하는 경우는 매우 저조하다. 그러나 최근 의사 수 증가 등 사회 환경의 변화는 많은 의사들을 진료현장 밖으로 나가라고 요구하고 있다. <메디칼타임즈>는 현재 타 직종으로 진출한 의사들의 사례를 살펴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상>진료실 밖으로 나간 의사들
<중>진료실 밖의 삶, 꿈 그리고 이야기
<하>의사에서 새로운 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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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과전문의 이동필 씨(40)의 출근 장소는 개인의원이나 병원이 아닌 서초동 법조타운내 한 변호사 사무실이다.
전문의과정과 공중보건의까지 마친 그는, 뒤늦게 사법고시에 도전, '의사'가 아닌' '변호사'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의료소송전문 변호사를 꿈꾸며 진료실이 아닌 법정에 그는 서 있다.
의사인 강석훈 씨(34)는 하루는 드라마 촬영장에서 시작한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촬영장으로 나와 대본을 확인하고 촬영에 필요한 소품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저녁 늦게까지 촬영이 있는 날이라면 촬영을 마치고 다음날 촬영분 대본 작업까지 마치고 새벽에서야 잠자리에 든다.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전임의까지 지낸 그는, 결국 드라마작가라는 새로운 시도를 위해 청진기를 놓고 가운을 벗었다.
법정으로, 촬영장으로 출근하는 의사들
대다수 의사들의 진로는 '진료현장'이다. 개업의든, 봉직의든, 교수든 환자를 보고, 치료하는 일에 종사한다. 진료현장을 떠나는 의사들은 극소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기존 의대과정이 긴 탓에 타 영역으로 진출하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예방의학과가 비인기과인 것을 보면 진료현장은 의사들의 숙명이나 필연인 듯 하다.
그러나 최근들어 이동필 변호사나, 강석훈 작가와 같이 진료현장을 떠나 다른 길을 모색하는 의사들이 점차 늘고 있다.
의사가 매년 3천명씩 배출되는 현실도 진료현장밖으로 나가도록 하는 촉매제이지만, 적성과 꿈을 찾아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의사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정관계에서부터 산업계, 문화예술계, 언론계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의사들, 정관계에 대거 진출
복지부, 질병관리본부 등은 꽤 많은 의사들이 진출해 있으며, 진출이 활발한 영역이다. 보건의료라는 분야에 대해 전문성을 갖고 있는 의사들로서는 진출이 꽤 용이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최근 정부가 행정고시 출신자외에도 전문성을 갖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것도 호재다.
이 중 대표격이라면 오대규 질병관리본부장(54). 전북의대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보건학 석사를 받은 그는 지난 84년부터 보건복지부에서 근무했다.
초기에는 방역, 지역의료, 보건교육 등에서 국립소록도병원 원장, 국립공주결핵병원 원장 등을 거친 후 보건자원관리국 국장, 보건증진국 국장, 건강증진국 국장 등을 거쳐 현재 질병관리본부장을 맡고 있다.
이종구 복지부 보건정책관(50)은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전임의를 하다 행정부에 몸담게 됐다. 연천군 보건의료원장, 국립보건원 보건행정담당관 등을 거쳐 방역과 과장, 건강증진국 국장 등을 지냈다.
반면 가장 최근에 들어온 의사출신 관료는 지난 3월에 복지부에 들어온 김유석 사무관으로, 그는 연대의대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후 복지부의 문을 두드린 경우다.
이들은 모두 행시가 아닌 특채로 복지부에 들어왔다. 전공은 인턴만 마친 경우부터(손영래 사무관), 예방의학과(김소윤 서기관), 가정의학과(이종구 정책관), 정신과(김유석 사무관) 등 다양하다.
정계에도 의사출신들이 없지 않다.
먼저 3선인 한나라당 정의화 의원은 이미 의사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부산의대를 졸업하고, 부산 봉생병원장 등을 거쳐 정계에 입문한 그는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이 국회 연설도중 쓰러지자, 즉석으로 응급처치 하는 능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신경외과 전문의.
초선인 안홍준 의원도 오랫동안 진료를 해온 의사출신(산부인과 전문의)이다. 그는 부산의대를 졸업하고, 중앙자모병원을 운영하면서 지역 NGO활동을 해오다 정계에 입문했다.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안명옥 의원과 전 의협회장 출신인 신상진 의원 등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외에도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일하는 지자체의원도 있는데, 박중현 천안시의원, 고창원 부산해운대구 구의원 등이 그들이다. 김주경 전공의협 사무총장은 신상진 의원실에서 보좌관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언론계, 의학전문기자 모시기 '붐'
언론계는 최근 사회적 변화에 따라 '의학전문기자'의 직함으로 의사들의 진출이 활발한 분야이다.
중앙일보 홍혜걸 기자가 국내최초의 의사출신 의학전문기자 1세대이고, 그 이후 많은 의사들이 언론사의 문을 두드렸다.
김양중 한겨레신문 기자, 이진한 동아일보 기자, 황세희 중앙일보 기자, 김철중 조선일보 기자, 이충헌 KBS기자, 신수아 KBS 기자, 신재원 MBC기자 등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초기에는 전문의과정을 밟지 않은 의사들이 주를 이루었다면, 최근들어서는 전문의 자격을 가진 의사들의 진출(가정의학과 전문의-신재원 기자, 정신과 전문의-이충헌 기자)도 활발해지고 있다.
법조계, 의사출신 10여명 채 안돼
의료계와 함께 대표적인 전문직으로 꼽히는 법조계에 투신하는 의사들은 아직 많지 않다. 새로이 다년간 공부를 해야한다는 점에서 의사들의 진출이 쉽지 않은 분야이기 때문이다.
현재 의사출신 법조계 인사는 10명이 채 안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매 기수마다 의사 2~3명이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으로 알려져 수는 점차 늘 전망이다.
의사 출신으로는 김성수 변호사(법무법인 지평)가 최초고, 이동필 변호사, 문현호 서울중앙지법 판사, 유화진 대법원 재판연구관실 연구원, 김연희 변호사, 박영만 변호사, 박호균 변호사 등이 뒤를 이었다.
전문의 과정을 거친 의사는 이동필 변호사(내과, 의성법률사무소)가 최초이고, 김연희 변호사(가정의학과), 박영만 변호사(산업의학과) 등도 전문의 과정을 마쳤다.
"제약부터 바이오산업까지" 진출 활발
제약업계 의사가 진출하는 경우는 이제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의사들의 모임인 제약의학회(회장 이일섭 GSK 부사장)도 창립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각 제약사마다 5~10명씩의 의사들이 포진하고 있다. 학술, 임상, 마케팅 등 분야도 다양하다.
현재 삼양사 의약BU장인 이동호 부사장은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한양의대 마취과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이 대표적인 인물이고, 지동현 한국애보트 전무, 최원 GSK 상무, 최성준 사노피 아벤티스 상무, 손지웅 아스트라제네카 상무, 김범수 BMS Korea 상무, 김용수 한국베링거인겔하임 이사, 이대희 한독약품 이사, 정수진 한국사노피파스퇴르 이사, 김철준 한독약품 부사장 등 많은 의사들이 제약업계에 진출해 있다.
바이오산업이나 IT, 건강기능식품 쪽으로 진출한 사례도 많다.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업체인 안철수 연구소의 안철수 의장과 메디포스트의 양윤선 사장은 이미 유명한 인물.
(주)모코코 대표는 삼성제일병원 기획실장을 지낸 한인권 씨이고, 황성주 이롬생식 회장, 정현진 이노셀 사장, 서정선 마크로젠 회장,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이경률 바이오코아 대표, 박진오 대공엘에스 회장, 장정호 세원셀로텍 사장 등도 의사 일을 하다 뛰어든 사람들이다.
이외에도 대학총장으로는 서정돈 성균관대 교수와 김인세 부산대 총장 등이 있으며, 투자 전문가로 이름이 알려진 박경철 씨, 드라마작가를 택한 강석훈 씨,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간 뒤 1960년부터 꾸준히 시집을 내고 있는 마종기 시인, '거리에서', '널 사랑하겠어' 등을 작곡한 가수 김창기 씨(동물원) 등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