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분업 이후 의료기관들은 환자 만족도를 높이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친절경영, 원스톱진료 등을 시도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환자들은 ‘3시간 대기, 3분 진료’로 고통받고 있으며 병원에 대한 불신도 더욱 팽배해지고 있다. 여기에다 진료분야가 점점 세분화되면서 의사도, 환자도 고립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새로운 대안진료가 무엇인지 집중취재한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상>3세대 환자 중심의 진료 상륙
<중>의료의 질 발목잡는 건강보험
<하>불가능 딛고 세계 최고를 향해
지난 5월 26일 오후 1시 서울아산병원 동관 1층 암센터 통합진료실.
호흡기내과 심태선 교수, 종양내과 이대호 교수, 흉부외과 김동관 교수, 방사선종양학과 송시열 교수, 영상의학과 도경현 교수가 속속 진료실로 들어왔다.
심태선 교수는 교수들이 모두 자리를 잡자 박 모 환자가 쇄골상부 림프절의 전이암으로 나왔다는 검사 결과를 브리핑했다. 이어 다른 교수들도 각자 의견을 내놓았다.
도경현 교수 “다른 병원에서 촬영한 가슴 CT에서는 왼쪽 아래 폐 뿐 아니라 왼쪽 폐문 림프절 등 여러 곳에서 전이 소견이 나왔다”
김동관 교수 “쇄골상부 림프절에도 전이가 된 상태여서 수술은 어려운 상황이다”
송시열 교수 “범위가 국소적이지 않아 방사선 치료도 좀 어려울 것 같다”
이대호 교수는 “그럼 다시 가슴 CT를 촬영한 후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떠냐”며 다른 교수들의 의견을 구했다.
이 교수는 다른 교수들이 모두 동의하자 박 씨와 보호자를 진료실로 들어오게 했다.
심 교수가 환자에게 교수들을 차례차례 소개하고 나자 도 교수는 검사결과 전이암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환자에게 조심스럽게 알려줬다.
순간 환자 표정이 어두워졌고, 보호자가 숨을 죽인 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이 교수는 “수술은 어렵지만 다른 치료방법이 있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의료진 모두 천수까지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테니 기운을 내라”고 안심시킨 후 향후 치료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그제서야 환자도 다소 안심이 된 듯 “멍하고 막막하지만 여러 선생님들께서 최선을 다해주신다고 하니 믿고 따르겠다”고 말한 뒤 간호사를 따라 진료실을 나갔다.
서울아산병원 암센터 통합진료의 한 단면이다.
통상적으로 암환자들은 검사에서 진단, 치료를 받기까지 길게는 몇 달에 걸쳐 이 진료과, 저 진료과를 전전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환자는 지쳐가고, 불만과 불신이 생겨난다. 다른 병원으로 옮긴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지방 환자들이 겪어야 할 불편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몇 년 전부터 원스톱진료가 유행하고 있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별로 나아진 게 없다. 환자가 집중되는 대형병원에서 여러과 진료를 당일에 끝낸다는 건 쉬운 일도 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양내과는 항암치료를, 외과는 수술을, 방사선종양학과는 방사선치료를 권유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기 일쑤다. 의료전문가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환자에게 어떤 치료를 받을지 선택을 강요하는 셈이다.
그러나 통합진료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다.
대장암을 예로 들면 환자는 이 과, 저 과를 옮겨다닐 필요가 전혀 없다. 코디네이터의 지시에 따라 예약된 날짜에 맞춰 통합진료실로 오면 소화기내과, 종양내과, 대장항문외과, 방사선종양학과, 심지어 영상의학과 교수까지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그러면 교수들은 검사결과를 보면서 각자 전문 소견을 피력하고, 치료방침을 협의해 결정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기존의 치료 프로토콜을 수정, 보완하기도 하고, 치료 순서를 교통정리한다.
단 한번의 진료를 통해 치료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암환자들을 이런 방식으로 진료하진 않는다. 초진환자이거나 재발환자, 여러 과 의사들의 의견을 구해 통합진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대상이다.
서울아산병원은 왜 통합진료를 하는 것일까.
폐암1팀 박승일(흉부외과) 교수는 “한 의사가 단독으로 치료하면 판단이 흐려질 수도 있다"면서 "아무래도 외과의사는 수술에 비중을 둘 것이고, 종양내과는 항암치료, 방사선종양학과는 방사선치료를 선호할 게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는 “나 스스로 진단하고, 치료를 하면 자칫 잘못된 결정을 할 수도 있지만 여러 과 의사들의 의견을 모아 최상의 치료방침을 정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피어 리뷰(Peer Review)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밝혔다.
서울아산병원 암센터가 통합진료 시범사업에 들어간 것은 지난 2006년 6월. 대장암, 폐암 등 5개암을 대상으로 각각 1개 팀이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던 것이 이젠 대장암이 무려 다섯 개 팀으로 늘어났다. 폐암과 비뇨기암을 다루는 교수들도 스스로 팀을 꾸리기 시작해 각각 한 팀씩 더 생겨났다. 식도암팀, 유방암팀, GIST팀도 자리를 다지고 있다.
“우리나라 의료환경에서 통합진료는 불가능해”라고 생각했던 교수들이 자발적으로 새로운 대안진료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이젠 대세로 자리잡았다.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발달장애클리닉 역시 2006년 6월부터 소아정신과 송동호 교수, 소아신경과 김흥동 교수, 소아재활의학과 나동욱 교수가 주 1회 통합진료를 하고 있다.
통합진료를 받은 환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폐암을 의심한 김 모(45) 환자는 대구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3차례 외래진료를 받은 뒤 서울아산병원 폐암팀에서 최근 통합진료를 받았다.
그는 메디칼타임즈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연신 의료진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김 씨는 “교수들이 바쁠텐데 모두 모여 치료계획을 정해주니까 무엇보다 안심이 된다”면서 “앞으로 몇 번을 더 올라와야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한 번에 해결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는 “사실 암환자들은 어느 선생님이 뛰어난지 찾아다녀 보지만 불안할 수밖에 없는데 통합진료를 해주니 믿음이 간다”면서 “환자 입장에서는 금상첨화”라고 덧붙였다.
반면 병원 경영자 입장에서 보면 통합진료는 최악의 진료시스템이다.
5명이 한꺼번에 진료를 한다고 해서 진료비를 더 받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각각 진료하면 진찰료가 5회 산정되지만 통합진료를 하면 1회만 인정된다.
여기에다 1명이 단독진료를 하면 한나절에 50명에서 많게는 100명도 볼 수 있지만 통합진료팀은 기껏 5~10명이 고작이다.
저수가 환경에서는 짧은 시간에 ‘3분 진료’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데 통합진료는 환자 입장에서는 금상첨화지만 병원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아산병원이 통합진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환자의 진료 편의를 높이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암 치료성적을 높이자는 의도다.
서울아산병원 이정신 부원장은 “아직도 내 환자는 내가 치료한다는 의식이 팽배하고, 자연히 환자는 어느 의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치료방향이 결정 된다”면서 “하지만 통합진료는 동료 의사들로부터 동의와 인정을 받아야 치료를 할 수 있는 획기적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환자 입장에서 검증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시간적, 경제적 부담까지 크게 덜게 된다면 최상의 환경이 아닐 수 없다.
이 부원장은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최선의 치료이며, 이는 진료 페러다임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김종훈(방사선종양학과) 교수는 “혼자 암 치료의 대가가 아니라 여러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수용할 때 진정한 대가가 되는 것”이라고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