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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불신' 배경은 처절한 의약분업 투쟁 학습효과

발행날짜: 2020-09-02 05:45:59

"못 믿겠다" 전공의들 초지일관 '철회' 명문화 요구 이유 있다
의약분업 당시 '당근책' 수가인상…결국 의료계엔 '독배'

|초점| 의료계는 왜 정부의 '약속'을 못 믿게 됐을까?

보건복지부, 국회에 이어 대통령까지 나서 의료계를 향해 의료계가 반대하는 4대악 정책을 코로나19 이후로 중단할테니 믿어달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지만 전공의들은 '철회' 명문화만을 요구하고 있다. 전공의 즉 의료계가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메디칼타임즈는 20년전 의약분업 투쟁에서 그 원인을 짚어봤다. <편집자주>
의료계 특히 전공의들이 정부의 의대증원 및 공공의대 정책에 반기를 들며 무기한 파업에 나선지 2주째 접어들었다.

복지부는 물론 국회,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의료계 의견을 수용해 재논의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지만 전공의들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고 있다.

정부 정책 '철회' 혹은 '원점에서 재논의'를 명문화해달라는 기존 입장에서 협상의 여지가 안보인다. 그 이외는 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젊은 의사들은 왜 복지부는 물론 국회, 대통령의 약속에도 믿지 못하겠다며 '각서' 수준의 명문화를 요구하는 것일까.

사실 이들의 불안감은 과거 의정관계에서 시작한 것. 20년전인 2000년으로 거슬러가보자.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올바른 의약분업쟁취를 위한 범 의료계 결의대회는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3만여 회원이 참석, 의권투쟁의 기폭제가 됐으며 이 결의대회는 의협이 주관한 최대의 옥내행사로 기록된다. 1999. 11. 30 자료: 대한의사협회 100년사.
당시에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100대 국정과제이자 대선공약이었던 '의약분업'을 밀어부쳤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7월 1일부터 주사제를 제외한 모든 전문의약품을 포함하고 외래환자에 대한 원외처방전 발행을 의무화한다고 발표했다.

앞서 1996년 국무총리실 산하에 의료개혁위원회를 설치하고 의약분업을 중장기 과제로 논의를 하고 있던 중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액셀을 밟은 셈이다. 2020년 현재와 마찬가지로 의료계와의 합의는 없었다.

당시 의사협회는 간신히 시행 시기를 1년간 연기하면서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의약분업실행위원회에서 의료계의 의견은 묵살되면서 급기야 1999년 11월 30일 장충체육관에서 주최 측 추산, 약 3만여명이 참석하는 궐기대회로 이어졌다.

여기까지는 투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정부가 연기한 2000년 7월, 의약분업 시행을 앞두고 의료계는 본격적으로 투쟁의 불씨를 당겼다.

의약분업 시행을 한달 앞두고 의협은 과천청사 앞에서 잘못된 의약분업 저지를 위한 전국의사 결의대회를 열고 의료계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폐업을 강행하겠다고 정부를 압박했다 2000. 6. 8.자료: 대한의사협회 100년사.
2000년 2월 17일 궐기대회에 이어 6월 8일 과천 정부청사 앞에서 '잘못된 의약분업 저지를 위한 전국의사결의대회'를 열고 의료계 10대 요구안을 선포,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파업을 감행하겠다고 나섰다.

과천 정부청사 앞에서 열린 결의대회에는 개원의를 비롯해 전공의, 봉직의, 의대생까지 가세하면서 투쟁 열기가 극에 달했다.

결국 보건복지부는 6월 15일, 보험수가 9.2% 인상안을 제시하며 회유를 시도했지만 의협회원 98.9%는 정부안을 거부하고 6월 20일부터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다.

개원의에 이어 일선 대학병원 전공의, 교수들까지 집단행동에 동참의사를 밝히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결국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7월에 만나 임시국회에서 약사법 개정을 약속했고, 의료계를 이를 믿고 무기한 파업을 철회했다.

하지만 패착이었다. 막상 7월 국회에서 재개정은 사실상 개악으로 판명됨에 따라 의료계는 8월 1일, 또 다시 파업에 돌입하면서 8월 22일까지 전면 파업, 25일까지 단축진료, 9월 15~17일까지 3일간 전국의사 휴진투쟁을 통해 정부의 약사법을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2000년도 당시 조선일보 1면 기사 캡쳐.
이 과정에서 당시 의협의 수장이 김재정 회장과 서울시의사회 한광수 회장, 의쟁투 신상진 위원장, 최덕종 부위원장 등이 구속됨에 따라 의료계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이에 분노한 의사(의대교수, 의대생, 전공의, 개원의, 봉직의 등)들은 또 다시 8월 31일, 보라매공원에 집결해 '의료개혁 원년 선포식'을 갖고 이전 시위에서 정부가 폭력진압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고 성실하게 협상에 임할 것을 촉구했다.

당시 복지부 장관과 서울경찰청장의 해명과 사과를 받아내고 9월 26일 정부와 공식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여기서 의료계는 28번의 협상을 통해 정부로부터 몇가지 약속을 받아내고 결국 2000년 11월 11일, 의·약·정 협의회 협상을 거쳐 12월 11일 합의안에 서명했다.

의·약·정합의안을 두고 의료계는 부정적인 여론이 우세했지만 이미 합의안에 사인을 한 이상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약사법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했고 이후 전공의는 진료에, 의대생은 수업에 복귀했다. 장기간 이어진 집단행동의 결과는 씁쓸했다.

서울 보라매 공원에서 개최된 의료개혁 원년 선포식 2000. 8. 31. 자료: 대한의사협회 100년사.
결과적으로 수개월 간 이어진 투쟁에도 의약분업은 당초 정부가 발표한 안으로 추진됐다. 다만, 의료계는 대통령 직속 '의료제도개혁특별위원회' 설치, 보험재정 50% 지원, 의료전달체계 개선, 의사인력 수급 조정 등으로 만족해야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의료계에는 의약분업 후폭풍이 몰려왔다. 의약분업 이후 정부는 건강보험 재정 부담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개정적자 폭을 감당할 수 없어지자 앞서 인상했던 수가를 다시 인하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건보재정 확충 일환으로 대대적인 수진자 조회를 실시해 부당청구를 색출하겠다고 나서는 등 의료계는 의약분업 이후 여진에 시달려야 했다. 의료계는 의약분업을 끝까지 반대했지만, 제도 시행에 따른 후폭풍은 의료계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투쟁 현장에서 진두지휘했던 이들은 2020년 의료계가 정부를 불신하는 모습을 어떻게 바라볼까.

2000년 당시 의쟁투 대변인, 주수호 전 의협회장
2000년도 의쟁투 대변인이었던 의사협회 주수호 전 회장은 의료계가 불신할 수 있는 역사라고 봤다.

그는 "2000년 당시 파업을 접는 당근책으로 수가인상을 제안했고 의료계는 이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결국 몇년 뒤 건보재정 악화로 다 뺏아갔다"며 "이번에도 4대악 중단 이외 받아선 안된다. 명분을 끝까지 지켜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전공의들이 요구하는 명문화는 필요하다"며 "다만 '철회'라는 단어 대신 '정부와 의협이 합의하기 전에는 일방적으로 추진하지 않는다'라는 문구라면 내용상 철회를 의미하는 만큼 수용할 수 있다고 본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대한전공의협의회장이었던 아주대병원 김대중 교수(당시 세브란스병원 내과 4년차)는 "전공의들이 명문화를 요구하는 배경에는 파업이 끝나고 병원으로 돌아가면 다시 정책에 눈닫고 환자진료에 매몰돼 돌아볼 수 없기에 올인하는 것일 수 있다"고 했다.

2000년 당시 대전협회장, 아주대병원 김대중 교수
그는 이어 의료계에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정부는 자신들의 스타일대로 정책을 추진하는데 그에 반해 의료계는 정부정책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사실 첩약도 공공의대도 갑자기 나온 얘기가 아니다. 당장 진료에 바빠 정책 개발에 소홀한 결과가 여기까지 온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그에 따르면 의약분업 당시에도 제도 시행 이후 환자 이용 감소를 우려해 진찰료와 처방료를 보전해줬다. 하지만 막상 환자 이용이 늘자 처방료를 없앴지만 약국에 조제료는 살아남았다.

김 교수는 "의료계도 정책 논리 개발을 했더라면 처방료를 유지할 수 있었을텐데 노력이 부족했다고 본다"며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책단 만들고 끊임없이 정부와 논의하고 정책 제안을 해야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