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calTimes
  • 오피니언
  • 젊은의사칼럼

평범한 의대생의 하루, 계획에 대한 깊은 생각

최시연
발행날짜: 2021-04-05 05:45:50

최시연 학생(가천의대 본과 1학년)


좋아하는 노래를 질리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노래를 알람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오늘 내가 한 첫 번째 생각이었다. 블라인드를 열자, 기숙사 창문 밖으로 푸르스름한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나에게 보이는 하늘의 크기는 딱 그 창 하나만큼의 크기이다. 아직은 어둠이 드리워 있지만 투명한 하늘을 보며, 날씨가 좋은 날은 어김없이 공부해야 하는 날임을 떠올린다. 잠을 더 달라고 항의하는 뇌를 깨우고자 창문을 밀어 제끼자 A4용지 한 장만한 크기의 공백으로 찬 공기가 밀려들어온다.

조금은 건조한 도시의 아침 공기 냄새 사이 연하게 초봄의 나무 냄새가 난다.

mbti가 한 때 P(즉흥형, 계획형과 반대) 였던 나지만, 정리하지 않으면 놓치는 부분이 많아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플래너를 정리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플래너 쓰기에 곧잘 맛을 들였지만 어제 다 해결하지 못한 강의록 복습 계획과 눈이 마주치자 계획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조금 사라진다. 그 항목을 끌어다가 오늘 오후에 추가해 놓고, 오늘이 가기 전 할 일로 '칼럼 쓰기'를 적은 뒤 플래너를 덮는다. 이번 주제는 사회적인 내용을 다루기보다는 의대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면 좋겠다고 전하던 회장님의 말이 떠올라 벌써부터 무슨 내용을 써야 할지 막막해진다.

약리학 수업시간은 오늘도 어김없이 벅찬 세 시간이었다.

교수님께서는 강의록에 없는 설명들을 쏟아내셨고 강의록에 손필기를 하던 나는 결국 그 속도를 감당하지 못해 키보드를 꺼내들었다. 그마저도 강의록에 적힌 수백 개의 약물 이름은 다 거기서 거기 같아 보여 나는 그만 정신을 놓고 싶어진다. 수업시간에 이해하겠다는 생각은 사치라고 냉철하게 판단한 나는, 일단 빠트리지 말고 받아 적기라도 하자고 생각하면서 그 이상은 오후의 나에게 미뤄두기로 한다.

폭풍과 같은 세 시간 반이 지나고, 꿀같은 한 시간의 점심시간이 주어진다. 이 시간 안에 점심을 먹고 방을 청소하고 칼럼 초안을 잡고 싶다. 라는 생각은, 교수님께서 수업 직전 참고자료를 올려주시면서 보기 좋게 날아간다.

계획 세우기의 단점은?

계획을 세우는 것의 단점은, 그 계획을 지키지 못했을 때 작던 크던 실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 감정은 계획이 어긋나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짜증일 수도 있고, 계획대로 되도록 좀더 노력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일 수도 있다. 평소 나의 감정은 후자에 좀 더 가까웠다. 하지만 하루를 마친 조용한 밤에 그렇게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분노하다 보면, 문득 공허함이 찾아왔다.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분노하고 있지? 이 감정은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주지도 않고, 미완인 과제를 뚝딱 완성해주지도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하루를 계획함으로써 좀 더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일 뿐이었다.

사람은 누구든지 끊임없이 본인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열망한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며,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이왕이면 근사한 결과를 얻기를 기대할 것이다. 가끔은 남들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고, 그 순간에도 자칫 나의 기준을 잃지 않을까 경계하지만 또 그 균형을 맞추며 살아간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나는 계획을 세우고,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따금씩 많이 헷갈려하기는 한다. 사실, 내가 뭔가 틀을 만들고 그 안에 나를 집어넣으려는 것보다는 나의 특성을 인정하고, 이걸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이것도 내가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으며 그저 내가 좀 덜 불안해하기 위한 허울이 아닐까? 어디까지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 이고, 어디서부터가 나를 인정하지 않고 바꿔버리려는 데에 대한 과도한 스트레스인가. 반대로, 어디까지가 '나를 있는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소망' 이고, 어디서부터가 더 나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지 않는 안일한 사람의 아집일까.

3년간의 긴 수험생활을 끝내고, 처음으로 온 대학이라는 곳은 늦게 된 만큼 더 소중한 공간이었고, 잘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가지게 한 조직이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내가, 수험기간 동안 다른 사람들과 벽을 치고 공부에만 집중한 세월을 보상받기라도 하듯이 나는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고, 많은 활동을 하고 경험을 쌓았다. 그러면서 이러한 고민을 정말 많이 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3년 전의 나와 지금 나는 성격도 계획하는 것들도 많이 달라졌으니까. 혹여 또 나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이 생기게 되면 나 자신에게 위에 써놓은 수많은 질문들을 하며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해왔던 것 같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이런 고민을 멈추지 못하겠지만, 일단은 상당히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해 보일 수도 있는 결론을 하나 내려보기로 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분명히 노력하지 않는 상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할 것이고, 자신을 지키고 싶어하려는 노력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들이 서로 충돌할 수도 있지만, 두 욕망은 모두 나를 발전시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가기로 했다.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문구를 가져와 보았다. 시험기간이라 예민해진 정신은 이 글귀를 읽고는 내가 이걸 할 수 있으면 신이지 사람이겠냐 라는 비판적인 반응을 뱉어냈지만, 사실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계획 뿐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도움이 될 문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용기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라인홀드 니버

비록 바쁜 실습 일정에 치이거나 연이은 시험으로 허름해졌더라도, 조금이나마 잠을 보충해야 할 토요일 오전 9시에 보충수업이 잡혀 있더라도 (필자의 이야기 맞음), 우리는 나름의 속도와 에너지로 오늘 하루를 살아냈고 내일도 잘 이겨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도 치열한 고민을 하며 하루를 보냈을 당신에게, 우리의 이런 하루들이 모여 미래의 단단한 자신을 만들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와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진심으로 응원한다는 말을, 이런 조악한 글로나마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미래 우리가 누군가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게 될 때에, 고민했던 순간들이 모여 더 나은 처치를 떠올리게 하고 또 누군가에게 더 진심어린 위로를 전할 수 있게 되기를.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