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 위치한 간사이대학병원. 744병상 규모의 사립대학병원으로 6년 전에 신축되었다.
이미 국내에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은 지역별 병상 총량제가 엄격하게 시행되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700병상이 넘는 병원을 새로 만들 수 있었을까?
간사이의과대학 측은 히라카타시에 새로운 병원을 만들기 위해, 인근 지역에 있던 간사이의과대학 산하 병원들의 병상을 감축했다. 이렇게 기존 병원의 병상을 줄인 만큼 여분의 병상 TO를 확보해서, 새로운 병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히라카타시는 인구가 약 40만 명으로 제법 규모가 큰 도시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 있는 웬만큼 덩치가 되는 병원급 의료기관은 간사이대학병원과 약 300병상 규모의 공립병원, 2개가 전부다. 병상 총량제가 시행되고 있으니, 다른 병원들이 추가로 만들어질 가능성도 거의 없다.
이런 환경이 병원 운영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첫째, 환자 진료량을 늘려서 수익을 창출하고자 하는 경제적 압박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덜하다.
우리나라 병원들이 물량경쟁에 몰두하는 중요한 이유는 ‘생존’을 위해서다.
언제 새로운 경쟁 상대가 등장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몸집을 불려서 의료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끊임없이 높여야만 한다.
이에 반해 일본은 어차피 수익을 창출해도 병원 몸집을 불리는 것이 어렵고, 새로운 경쟁 상대가 등장할 가능성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무리해서 환자 진료량을 늘리고 수익 창출에 몰두할 이유가 크지 않다.
둘째, 환자 진료의 안정성이다.
일본은 사실상 특정 지역 환자의 입원진료를 특정 병원에게 독점적으로 맡겨 놓은 셈이다. 지역 주민의 건강과 질병 치료에 대한 병원의 책임성이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병원의 주된 관심은 '우리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맞춰지게 된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 지역에서 입원진료가 필요한 환자들은 지역 병원을 찾아오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의료의 본질을 벗어나는 부차적인 것으로 환자를 유인할 필요성이 별로 없다.
간사이대학병원의 일평균 외래환자 수는 약 1700명, 인접한 교토시에 있는 1200병상 규모의 교토국립대학병원의 일평균 외래환자 수는 약 2600명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주요 대형병원의 일평균 외래환자수는 약 1만명에 이르고 있다.
병상 기준으로 비교하면, 우리나라 병원은 일본 병원에 비해 약 3~4배 가량 외래환자 진료를 더 많이 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단위 인구당 의사 수는 일본이 우리나라의 1.2배, 간호사 수는 2.2배 수준이다. 의료인력 수까지 감안하면, 우리나라 의료인력은 일본과 비교할 때, 무려 5~8배에 이르는 노동강도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의사와 간호사가 제 아무리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해도, 이렇게 과중한 노동강도 하에서 양질의 의료서비스, 환자 중심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간사이대학병원, 교토국립대학병원은 어떻게 우리나라의 3분의 1에서 4분의 1 수준에 불과한 환자진료를 하고도 유지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일본 건강보험이 적정수가를 보장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비해 3분의 1에서 4분의 1에 불과한 환자진료를 하고, 약 2배에 이르는 의료인력을 고용하고도 병원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 만큼의 건강보험수가를 보장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건강보험수가는 우리나라의 약 3~4배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건강보험이 적정수가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근본적인 배경은 우리나라에 비해 건강보험재정이 넉넉하기 때문이다.
국민이 부담하는 건강보험료도 우리나라의 곱절이고, 정부의 국고지원도 우리나라의 곱절 수준이다(일본은 전체 건강보험료 수입의 약 30%를 국고지원하는데 반해, 우리나라의 국고지원 비율은 17% 수준에 불과하다).
이와 더불어, 단계별 의료기관의 기능이 정립되어 있다는 사실도 적정수가를 보장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중증환자, 경증환자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대형병원을 넘나드는 상황에서는 적정수가를 보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단계별 의료기관의 기능 정립은 적정수가를 보장하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이다.
올 4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의료기관 기능 재정립 방안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렇듯 논란이 지속되는 데에는 정부의 탓이 크다. 구체성과 진정성, 양 측면에서 모두 흠결 있는 방안을 내놓으니, 사회적 논란과 이해당사자 간의 갈등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심각한 흠결에도 불구하고, 의료기관 기능 재정립 방안에는 우리가 고민해야 할 내용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병상 총량 관리는 우리나라 의료시장의 과열을 막고, 무리한 물량경쟁을 억제하기 위한 첫 출발에 해당한다.
그리고 단계별 의료기관의 기능 정립을 통해 동네의원은 외래 중심으로, 병원은 입원 중심으로 각자의 역할 구분이 되어야 적정수가도 가능하고, 양질의 의료서비스, 환자 중심의 의료서비스 제공도 가능하다.
이와 함께 의료인도 과중한 노동의 굴레에서 한결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의료인을 위해, 그리고 국민 건강을 위해 어떤 한국 의료의 모습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책임 있는 판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