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보건복지부의 현지조사 대상으로 지정되면, 일선 의료기관 원장은 말 그대로 혼비백산의 상태가 된다.
의료기관은 순식간에 자료를 빼앗기게 되고(관련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1년의 업무정지 처분이 내려진다), 원장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조사관들은 자인서에 서명을 요구한다.
보관 중이던 자료에 사소한 오기나 탈루가 있어도 조사관들은 원장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지금 서명하지 않으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단다. 결국 원장은 눈물을 머금으며 서명을 하게 된다.
심지어 조사관들은 의료기관이 보관 중이던 전산 DB까지 요구한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청구 DB와 의료기관의 전산 DB를 프로그램을 통해 비교하면 부당청구 내역을 순식간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장들은 조사관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더 큰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원하는 자료를 모두 내주고 만다.
그런데 최근 이런 보건복지부의 조사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전자서명이 없는 전자의무기록은 조사관에게 제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서울행정법원 제14부는 조사관의 전산 DB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가 1년 업무정지처분을 받은 일선 원장이 제기한 소송에서 다음과 같이 판결하였다.
“의료법에서는 전자서명이 없는 전산기록을 작성·보관하도록 명하고 있지 않다. 시행령에서 전산기록 제출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무효다.”
제주도 현지조사 사건 등으로 일선 의료기관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있는 가운데, 이번 판결을 계기로 논란을 종결 짓고, 적법절차를 기반으로 한 현지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판결문의 논리에는 다소 찝찝한 구석이 있다. 행정법원은 의료법에서 ‘전자서명’이 가미된 전자의무기록을 보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전자서명의 유무를 사건의 핵심 쟁점으로 다루었지만, 전자서명의 유무에 따라 진료기록의 본질이 달라진다는 것은 지나치게 형식에 치우친 논리다.
법원의 논리대로라면 전자서명 없이 진료기록부를 전산화 한 의료기관들은 진료기록부를 보관하고 있지 않다는 결론이 도출된다(문제의 병원은 전산DB 외에 별도의 진료기록부를 보관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진료기록부를 작성·보관하지 않는 것은 의료법 위반이다. 이번 판결은 결국 논란을 종식시키기는커녕 또 다른 논란거리, 또 다른 행정처분의 빌미를 마련했을 뿐이다.
그리고 판결에서는 배척되었지만, 복지부 측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하물며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매출기록을 전산화하고 있는 정보화 시대에 유독 의료기관에 대해서만 수기의 진료기록부를 고집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하고, 대부분의 기업에서 자료를 전산화 하고 있는 가운데, 의료계에서는 언제까지고 ‘종이서류’만을 만지작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법은 그 시대의 상식을 반영한다. 이 시대의 상식에 의하면 전자DB도 충분히 서류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수기로 작성하던 진료기록부를 전산화한다고 하여 그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보험재정과 국민건강을 보호하고자 하는 지도·감독의 취지를 고려한다면 수기 진료기록부가 없는 의료기관은 전자DB라도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자연스럽다.
관련서류들을 문서를 통해 일일이 비교하는 작업보다는 전자DB를 통한 프로그램 분석이 인력 및 비용을 절감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판결의 결론에 따를 경우 일부 의료기관들에게는 진료기록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아날로그적 일처리를 강요받게 된다.
그렇다면, 차라리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전자DB의 제출을 법적으로 의무화해야 한다는 복지부 측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현장에서 법해석을 두고 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법조문을 재정비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조사권한만 확대시키기 보다는, 의료기관의 방어권이 충분히 존중되는 상황에서 적법하고 정당한 절차에 따라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여 의사들이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당하는 상황을 최대한 방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전자DB를 작성, 제출하여 조사의 편의에 도움을 주는 의료기관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보상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 전자DB 제출과 관련하여 들려오는 수많은 잡음을 잠재울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