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부터 '상생'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지만 유독 의료계에서만큼은 이 단어를 듣기 어려웠다.
한정된 건강보험 재정의 파이 안에서 제 밥그릇을 챙겨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다 보니 직역은 직역대로 갈등을 빚고 전문과는 과별로 대립각을 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게다가 저수가로 인한 3분 진료의 환경은 의사와 환자가 신뢰 관계 구축보다 의료서비스 '제공자'와 '소비자'의 관계로 만나게 하는 일도 많았다.
시민단체까지 가세해 (의사들의 희생이 전제된) 보장성 강화를 요구하는 복잡한 보건의료 환경에서 만큼은 '상생'보다는 '투쟁'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그런데도 최근 의사협회는 오래 묵은 '상생'이란 단어를 꺼내들었다.
노환규 의협 회장이 시민단체와 합세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왜곡된 보건의료 제도를 바꾸자고 말하더니 최근엔 약사회를 방문해 상설협의체를 구성해 상생하자고 말했다.
확실히 의사협회의 행보는 투쟁만을 강조하던 예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 여기에 혹자는 대정부 투쟁에 지친 의협이 슬그머니 상생이란 이름으로 꼬리를 내린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노 회장의 상생 언급에는 수긍할 부분이 상당히 많다.
노 회장은 최근 김용익 의원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진보성향 시민단체와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적정한 의료의 질을 담보하고, 국민 부담을 덜기 위해 건강보험료 인상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자 깜짝 놀랐다고 표현했다.
사실상 의협 주장과 시민단체 주장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것.
국가가 개인의 질병에 대해 도와주지 않기 때문에 환자는 의료비로 힘들어하고 의료계는 작은 건보재정 속에서 저수가로 힘들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의료 질 저하를 걱정해 포괄수가제 강제시행을 저지해달라고 외쳐도 당장 내일의 의료비를 걱정해야 하는 국민들 입장에서는 이런 말이 들릴리 없었다.
이런 이유로 멀리는 의약분업부터 포괄수가제 저지까지 의료계는 매번 '나홀로 투쟁'을 강행하다가 번번히 백기를 들지 않았나. 이제는 투쟁에서 상생으로 패러다임 쉬프트가 필요한 때다.
의사+국민 vs 정부의 구도를 통해 국민과 함께 의료의 질을 걱정하고 의료비 부담을 걱정해야지만 가시적인 성과가 돌아온다.
국민을 등에 업지 못한 투쟁은 언제나 '백전백패'였다고 과거의 교훈이 말해 주고 있다. 애써 외면해 왔던 오래된 미래, 상생이라는 화두를 주목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