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서울 모 병원이 청구한 혈우병 환자 치료비 10억원의 처리 문제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보험급여 인정 여부가 한 어린 혈우병 환자의 생사를 판가름할 수 있기 때문이다.
1일 심평원과 혈우병환자 단체인 한국코헴회에 따르면 혈우병 환자인 박모 군(남, 3살)은 최근 장출혈이 발생해 서울 K 의료원에서 두 번에 걸쳐 응급수술을 받았다.
지혈이 어려운 혈우병 항체환자인 박군은 혈액구성의 8인자와 9인자 항체를 동시에 갖고 있어 고가약인 N제제를 사용해야만 약물기전이 작용하는 특이한 케이스.
이 때문에 박군을 치료하는데는 10억원이 넘는 비용이 들었다. 병원측은 이 비용을 심평원에 청구했고, 환자 가족과 함께 심평원의 처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병원 보험과 관계자는 "비교적 저렴한 F제제를 우선 사용치 않고 처음부터 고가인 N제제를 투여하는 것은 그동안 심평원의 삭감 대상이었다"며 "박군처럼 부득이하게 쓰인 경우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병원에 보험 급여지급이 계속 지연되거나 삭감된다"고 전했다.
한국코헴회 관계자는 "심평원은 보험급여 청구분에 대해 적절한 치료였는지에 대한 심사가 아니라 경제적인 치료였는지에 대한 검토만이 이뤄지고 있다"며 "박 군의 경우는 삭감을 우려, 초기에 경제적인 치료를 하려다 궁극적으로는 오히려 치료비가 늘어난 경우"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초반부터 강력한 치료효과를 가진 N제제를 쓸 수만 있었다면 10억까지 비용이 늘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건강보험 급여제도의 맹점을 꼬집었다.
관계자는 또 "박군의 건강보험 청구분 10억이 삭감되는 경우 병원이 치료비를 부담하거나 환자에게 떠넘겨질 수 밖에 없다"며 "K병원이 적자를 무릅쓰고 부담하더라도 계속 박군을 책임질 수 없고 다른 병원에서는 삭감을 이유로 진료를 기피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병원에서 삭감을 우려해 혈우병 환자 기피현상이 만연되면 출혈이 있을 경우 멀쩡한 병원을 눈 앞에 두고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며 이번 심사의 중요성을 시사했다.
박 군의 어머니 임 모씨는 "살다보면 언제 또 출혈이 있을지 모르는 데 이번에 보험적용이 되지 않는 것으로 판명나면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삭감되면 심평원에 가서 치료받을 것"이라고 말해 강경한 대응 의지를 표명했다.
임 씨는 또 "효능이 있는 고가약을 곧바로 쓰지 못하고 효과없는 권장약 투여로 치료시기가 늦춰지는 것을 보며 부모로써 속이 새까맣게 탔다"며 "삭감때문에 의사들이 소신진료를 하지 못하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어 "의사들도 심평원의 눈치를 보기보다 소신있게 진료할 수 있는 권리 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군의 주치의는 "OECD국가 중 환자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중증 희귀질환 치료에 대해 정부가 보장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며 건강보험 당연적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와 관련 심평원 이상웅 진료심사 평가위원장은 "아직 심사가 이뤄지지 않았는데 심평원이 급여지급을 일부러 늦춘다는 주장은 억울하다"며 "의학적 심사 원칙에 따라 삭감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혀 향후 심사결과에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의료계 한 관계자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현 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라며 "건보재정이 먼저인지 환자의 생명이 우선인지 판가름이 나게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