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병원이 말기암환자들에게 연명치료를 희망하는지 여부를 묻고, 원치 않을 경우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회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적은 말기암환자부터 존엄사의 공감대를 형성해 가자는 것이다.
서울대병원은 최근 의료윤리위원회(위원장 오병희 부원장)에서 ‘말기암환자의 심폐소생술 및 연명치료 여부에 대한 사전의료지시서’를 공식 통과시켰다고 18일 밝혔다.
사전의료지시서란 암의 진행 및 합병증으로 인해 향후 생명연장과 증상완화를 위해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치료를 받을 수 있음을 말기암환자에게 사전에 알려주고, 앞으로 행해질 치료를 받을지 여부를 미리 의사결정하는 서식을 의미한다.
서식은 중환자실 입원이 필요한 침습적, 적극적 연명치료로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치료를 예시하고, 각 항목의 치료를 원하는지, 결정하지 못했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서명하도록 했다.
서울대병원은 이 서식에 ‘심폐소생술 및 다른 연명치료 시행 여부는 환자분의 생명에 대한 가치관을 반영해 결정되는 것이 적절합니다. 따라서, 원하지 않는 경우 이 같은 시술은 거부할 수 있습니다’라고 명시했다.
이와 함께 환자 또는 대리인이 작성한 사전의료지시서가 타인에 의해 변경되지 않고 표기한 대로 법적인 효력을 유지하기를 희망한다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는 의료윤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지난 15일 말기 암 환자들에게 사전의료지시서 작성을 추천하기로 결정했다.
이보다 앞선 14일 서울대학교병원 내과(과장 박영배)는 의료윤리 집담회를 처음으로 열어 연명치료 중단과 관련한 윤리적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했다.
이에 대해 혈액종양내과 허대석 교수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보라매병원사건이 발생한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면서 “의료현장에 있는 의료계부터 수동적인 자세를 버리고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허 교수는 “서울대병원에서 1년에 600여명의 암환자가 사망하는데 매번 연명치료 문제가 발생하는데 관행적으로 연명치료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해 왔다”면서 “이것을 의료윤리위원회와 내과교수회의에서 공식화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대병원은 이날 말기암환자에 대해 연명치료를 중단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도 솔직히 고해성서했다.
2007년 1년간 서울대병원에서 암으로 사망한 656명의 환자를 조사한 결과 현행법으로 보호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말기암환자 436명(85%)의 가족들이 심폐소생술을 거부했고, 이를 의료진이 받아들여 연명치료를 중단했다는 것이다.
현행법상 의료기관은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없지만 관행적으로 불법행위를 행해 왔다는 것이다.
허대석 교수는 “연명치료 여부는 말기암환자로 국한된다”면서 “범위가 너무 포괄적이면 논란만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단계로 말기암환자들에게 연명치료를 받을지 여부를 결정하도록 한 후 여론을 봐가면서 2단계로 만성질환자(간경변, 만성신부전 등)로 범위를 넓히고, 마지막 3단계로 식물인간 등으로 확대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서울대병원이 이처럼 단계적 접근을 선택한 것은 지금까지 이들 모두를 포괄해 존엄사 논쟁을 한 결과 논란만 확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판단 때문이다.
허 교수는 “환자가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하는 것은 중대한 변화”라면서 “지금까지는 연명치료를 할 지 여부를 의료진이 결정했다면 앞으로는 환자가 선택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허 교수는 “보라매병원 사건은 환자 회생가능성이 있어 살인죄가 성립됐지만 말기암환자는 회생 가능성이 희박하다”면서 “엄밀히 말하면 이번 조치가 법적 시비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언제까지 이 상태로 할 수는 없고, 사회적 인식도 좋아졌다”고 덧붙였다.
허 교수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환자의 권리 문제에 대해 의료계가 적극적인 의견을 표명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면서 “말기 암환자들이 제도의 미비로 인해 불필요한 연명치료로 인한 고통이 줄어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대법원은 오는 21일 연대 세브란스병원 존엄사 사건과 관련 판결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