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의 흐름을 조정할 제도적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무상의료가 시행되면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환자가 집중되고, 중소병원은 도산 위험에 직면할 것이란 경고가 나왔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 허대석(서울대병원 교수) 원장은 8일 자신의 블로그에 '의료를 움직이는 손'을 주제로 글을 올렸다.
허 원장은 "대형 유통업체에서 피자, 치킨 등을 반값으로 판매하자 소비자들은 그것을 구하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는 사태가 벌어진 반면, 동네 소규모 상인들은 매출이 줄면서 생존을 위협받아 거칠게 항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환기시켰다.
가격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는 것이다.
허 원장은 "비용 부담이 없다면 보다 높은 질의 의료서비스를 찾아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환자들이 몰릴 것이고, 중소병원은 환자가 없어 도산의 위험에 직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허 원장은 2006년 실시된 6세 이하 어린이에 대한 무상입원제도가 2년만에 종결된 것을 사례로 들었다.
허 원장은 "국가적으로는 의료이용 증가로 인한 의료비 부담이 문제였지만 서울대 어린이병원은 입원대기가 6개월을 넘어서면서 응급환자조차 입원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게 더 큰 문제였다"고 꼬집었다.
왜냐하면 일단 입원한 환자들은 2차 의료기관으로 전원해도 될 정도로 회복됐음에도 이를 거부했고, 이를 통제할 아무런 행정적 장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4년간 미국 연수생활을 하면서 의료문제가 발생해도 본인이 근무하던 대학병원은 이용할 엄두도 못내고, 1시간씩 차를 몰고 작은 병원을 방문하곤 했던 이유는 본인이 가입한 의료보험은 보험료가 저렴한 대신 이용할 수 있는 의료기관을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에서 환자의 흐름을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논리였다"면서 "질이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학병원을 방문하려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무상의료에 기반한 영국은 비용 부담이 없으니 대학병원의 병실이나 응급실이 붐빌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한국처럼 복잡하지도 않을뿐더러 응급환자를 항상 받을 수 있도록 빈 병상을 10% 전후로 유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또 그는 "의사가 말기 암환자에 대해 대학병원에서의 무의미한 항암치료보다 호스피스로 전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결정하면 환자나 가족은 이를 신뢰하고 수용했다"고 설명했다.
영국의 무상의료에서 환자들의 의료기관 이용 흐름을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의학적 결정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결정에는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의사들의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한정된 의료자원을 어떻게 배분하는 게 정의로운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바탕을 둔 임상진료지침이 의료제도 운영에 반영된 결과"라고 못 박았다.
이와 함께 허 원장은 의료의 질에 대한 표준화가 이뤄져 있지 않고, 비용에 의한 시장논리가 주로 작동해 온 한국의 의료 상황에서 비용에 의한 장벽을 없애는 무상의료가 실시된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겠느냐는 화두를 던졌다.
허 원장은 "보다 나은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해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환자들이 몰릴 것이고, 일단 입원한 환자는 쉽게 퇴원하지 않아 병실회전율이 떨어지고, 입원을 하지 못한 환자들은 빈 병상이 나올 때까지 응급실 복도에서 기다리는 풍경이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그는 "대형병원들은 병상이 부족하다고 병원 증축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면서 "왜냐하면 이같은 환자의 흐름을 조정할 제도적 장치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