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 과제 여러 세부 과제로 나눠 교수별 실적 배분 "후학 위한 불가피한 품앗이"vs"의학계의 어두운 단면"
국가 기관이 발주하는 국책 과제를 비롯해 공공기관 등의 연구 과제들을 여러 기관, 여러 연구자로 나누는 일명 '과제 쪼개기'를 두고 현실론과 원칙론의 대립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각 대학에서 교수 임용과 승진 등에 규정을 강화하면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에 의학계의 어두운 단면일 뿐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국책 연구 용역을 수주한 서울 대형병원의 A교수는 22일 "용역 계약 당시 5개 기관에서 8명의 교수가 참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세부 과제를 3개 정도 만들어 진행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이 연구 용역의 발주를 보면 5개 기관의 8명 교수가 연구자로 등록돼 있다. 하지만 현재 이 용역에 참여하고 있는 연구자는 이미 20명을 넘어섰다. 기관 또한 11개 기관으로 두배 이상이 늘어난 상태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일까. 상당수 연구자들은 이를 관행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명망있는 교수가 연구 책임자를 맡고 시니어 교수들이 이름을 올려 전문성을 뒷받침한뒤 이를 각각의 세부과제로 나눠 주니어 교수들에게 맡기는 것이 오래된 관행이라는 것이다.
특히 최근 각 대학에서 교수 임용과 승진 조건으로 국책 과제 수행 실적 기준을 강화하고 있어 이러한 도움없이는 후학들이 자생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나온다.
A교수는 "우리 대학만해도 교수 임용 자체에 국책 과제 실적을 요구한다"며 "솔직히 말해 박사를 딴지 얼마 되지도 않는 후배들이 어디서 어떻게 국책 과제를 수주하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어 "그나마 주요 대학병원에 있다면 지도 교수에게 실적이라도 물려받겠지만 지역 등에서는 더욱 기회가 흔치 않다"며 "실제로 포닥(박사후 과정)들은 이러한 메커니즘이 없으면 자생 자체가 힘든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러한 의견들은 각 대학병원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대학에서 연구 역량 강화라는 목적으로 주니어 교수들에게 SCI급 저널 실적과 더불어 국책 과제 수주를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니어 교수들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설명이다.
수도권 대학병원의 B교수는 "그나마 만성질환과 같은 국책 과제가 잘 나오는 분야면 모르겠지만 우리 분야는 1년에 나오는 과제가 손에 꼽히는 수준"이라며 "쉽게 말해 주요 5개 대학에서 하나씩 가져가고 나면 나머지는 아예 구경조차 못한다는 의미"라고 털어놨다.
이어 그는 "그나마 명맥을 잇겠다는 후학들을 찾기도 힘든데 그들이 임용, 승진 실적 기준에 걸려 넘어지게 해서야 되겠느냐"며 "당연히 누가 용역을 따내던 나눠주는 것이 관행이 될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러한 관행들이 연구 용역의 질 하락을 부추기고 중복 연구로 자원이 낭비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연구 과제를 이러한 식으로 나눠서 진행하다보면 질이 하락할 수 밖에 없고 유사한 연구 용역들이 서로 겹치게 되는 상황들이 벌어진다는 지적이다.
대한의학회 이사를 맡고 있는 C대학병원 교수는 "각 대학에서 과도한 수준으로 연구 실적을 요구한다는 것은 충분히 공감하고 있는 얘기"라며 "하지만 그렇다고 연구 과제를 이런 식으로 쪼개다보면 학계에 대한 신뢰도가 크게 하락할 수 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그는 "결국 이렇게 나눠먹기 식으로 연구가 진행되면 어느 곳에 용역을 주던 비슷한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고 중복 연구 논란도 피하기 어렵다"며 "종국에는 그러한 실적 자체를 신뢰할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학계의 자성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