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4차 중앙약사심사위원회 의약품분류소위원회까지의 논의과정을 지켜보면서 이와 같은 소모적 논의와 방향이 과연 옳은가라는 걱정이 들게 된다.
아시다시피 미국이나 유럽에 가 보면 국민들이 편리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편의점이나 대형할인 매장 한 켠에 다양한 종류의 약들이 설명도 자상하고, 분류도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다. 소위 OTC(Over The Counter) 품목들이다.
의사의 진단과 용량-용법 처방도 없고, 무엇보다 약물 오남용으로 인한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없고,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은 없지만 별도의 수가가 지불될 만큼 중요하다는 복약지도조차 필요 없다.
그쪽 약이 더 안전한가? 그쪽 국민들이 더 튼튼하고 의학적으로 더 잘 알고 더 현명한가? 진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런 제도가 왜 필요하고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 그 속사정을 살펴 보면 국민의 편의성이 아니라 국민의 고통을 섬세하게 보살피는 배려와 타협의 차선책, 고육지책임을 알 수 있다.
그쪽 환자가 주치의와 대면진료를 받으려면 예약을 한 후 대체로 7일 안팎 이후에나 진료가 가능하고, 다시 전문의의 특화된 진찰이 필요한 경우에는 의뢰를 받아 또 한 두 달 정도 기다리는 일은 다반사이다.
수술이라도 받으려면 평균 9개월에서 18개월을 더 기다려야 한단다. 위중하거나 급한 경우라면 응급실이나 전문과 개인의원에 가야 하는데, 상당한 비용을 개인적으로 감수해야 한다. 한편 땅덩어리가 광활한 나라에서는 물리적으로 의료기관 접근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 고단하고 불편하고 불안한 진료 체계와 상황에서 약물의 안전성 및 오남용 방지와 국민-환자 편익을 저울질해 보니, 주치의의 상담이나 구두지시 하에 그렇게라도 약을 구입 복용하지 않으면 의사를 만나기 전까지 국민들이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수의 약들이 저용량이거나, 의사의 처방이 반드시 필요한 품목(처방약품, 전문의약품)이며 동시에 오티씨 품목인 이유이다.
함부로 잘못 쓰거나(오용), 너무 많이 쓰면(남용) 세상에 독 아닌 약은 없다. 약을 왜 쓰느냐의 기초는 정확한 진단이다. 우리나라는 다행히 1차 의료의 천국답게 집밖만 나서면 동네 골목마다 현명한 국민들로부터 검증과 선택을 받아 각과 전문의들이 단골 환자들의 건강을 지속적으로 밀착 관리하고 있다.
그래서 최저 비용(30년 전의 OECD 평균 수준)으로 최고 수준(상위 5위 이내)의 1차 의료 질 지표가 유지되고 전 세계가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모든 약(2분류로 전문의약품과 박카스나 파스처럼 약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 것들조차 포함한 일반의약품)을 오로지 약국에서만 구입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외국의 사례(그와 같은 제도가 왜, 어떻게 운영되는지는 차치하고)를 들어, 국민들이 최소한의 응급-상비 의약품은 슈퍼나 편의점에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요구를 하는 것이 이번 일반약 슈퍼판매 논의의 핵심이다.
국민-시민단체의 요구에 약사회는 전문의약품-일반의약품 분류를 새로 하여 약국에서 의사의 처방 없이 취급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을 확대하자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일본의 예처럼 한 번 물꼬가 트이면 약국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 것이고 슈퍼 판매로 예상되는 손실을 벌충하자는 계산도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민 건강은 어찌 될 것인지 같은 고뇌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드는 아주 기본적인 의문. 어떤 약을 쓸 것인지 써도 되는지를 결정하는 의사의 진찰과 진단을 생략해도 되는가? 환자가 언급하는 증상만 듣고 무슨 약을 줄 지 결정해도 되는가? 그 과정에서 국민 단 한 명이라도 본인이 미쳐 모르거나 언급하지 않았거나 혼동하기 쉬운 증상으로 인해 치료 적기를 놓쳐 만성으로 진행되고, 합병증과 후유증이 발생하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의사가 진찰 후 진단을 내려 의학적으로 합당하게 처방한 약에 대해서 처방내역을 검토하고, 처방한 그대로 정확하게 조제하고, 부득이 변경할 경우 통보하고 확인을 받는 것만이 국민 건강을 위해 약사에게 부여된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 국민 편익을 핑계로 약국에서 취급할 수 있는 일반약 품목의 확대를 논의할 때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상식 수준에서 당장 국민의 고통을 완화시키면서 비교적 안전하고 꼭 필요한 약, 예를 들어 해열제, 진통제, 소화제, 지사제, 감기약 같은 최소한의 품목으로 오남용의 위험 소지를 최소화하여 국민 편익에 부합한 방안을 찾아보자는 것만이 논의의 바람직한 방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녕 대다수 국민이 원하고, 의사와 상의를 하고, 상식과 현명한 자기결정권을 믿고, 약물 오남용을 최소화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의사의 지시 없는 약물 오남용에 의한 개개인의 부작용 피해는 각자의 책임이라는 시민의식이 자리잡을 때에야 비로소 지금 일반의약품으로 분류하고자 논의되는 약품에 대해 외국처럼 슈퍼 판매로 전환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겠지만, 우리 국민의 건강과 의료기관 이용 행태를 고려하고 현재 1차 의료 상황을 감안하면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공익과 국민을 대표하는 사회 각개각층의 전문가들께서는 국민 건강을 염려하는 우리 의사들의 충정을 귀담아 들으시어, 오로지 국민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현명한 판단을 모아주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