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거부·상임의사 태부족…"중재원 파행 불가피"

이창진
발행날짜: 2012-04-09 06:40:19
  • 무과실 분담·감정서 유출 문제 상존…의료계 "협조 불가"

[진단]의료분쟁중재원 불안한 출범

8일 출범한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하 의료중재원)을 바라보는 의료계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23년만에 법제화된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의료분쟁조정법)은 의료계의 오랜 숙환 사업에서 지금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모양새이다.

의사협회는 8일 노환규 당선자 주재로 열린 시도·시군구의사회장단회의에서 전문가 의견이 배제된 복지부와 의료중재원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조정업무 및 비상임위원 신청 등을 전면거부한다는 입장 재확인했다.

복지부는 의료계와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제도 안착에 만전을 기한다는 방침이나, 갈등 관계가 지속될 경우 의료중재원의 파행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속되는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 분담 갈등

우선, 최우선 화두는 불가항력적 분만 관련 의료사고의 보상금 분담 문제이다.

의료분쟁조정법에는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시 3천만원 한도 안에서 정부와 분만의료기관이 7대 3으로 분담, 보상하도록 되어있다.

복지부는 분만 1건당 2863원의 분담금으로 적립된 재원을 활용하는 만큼 30%를 부담한다는 의료계 주장은 과장됐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의료계는 전액 국가 보상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불가항력적 보상 규정은 의미가 없다는 시각이다.

무과실로 규정하고도 의사에게 책임을 물어 보상금을 분담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는 것이다.

A대학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분담금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면서 "불가항력적인 무과실이라고 정부 스스로 규정하고 의사한테 이를 보상하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보상금 규정과 관련 가이드라인도 논란거리다.

의료분쟁조정제도 이용 절차 모식도.
분만시 뇌성마비와 분만과정 중 산모 또는 신생아 사망시 등의 보상 대상을 3천만원 한도에서 보상하도록 규정했다.

산부인과 내부에서는 산모 또는 신생아가 사망시 3천만원 보상 보다 소송을 제기해 더 많은 보상금을 원하는 경우가 다수를 이뤄 중재원 기능 자체가 영향력이 없다는 지적이다.

더불어 미숙아 출산 1개월 후 사망이나 임신중독증에 따른 후유증, 산모의 진통시 심장마비 등 분만과 연관된 다양한 케이스에 대한 별도의 보상기준이 부재한 부분도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감정서 자료 유출 문제…변호사 소송 먹이감

다른 문제점은 의료과실을 분석한 감정서 유출 문제이다.

환자가 의료분쟁 조정 중재를 신청하면, 피신청인이 참여의사를 밝힌 후 절차가 시작된다.

중재원 감정단은 인과관계 및 과실 유무 등에 대한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조사를 통해 감정서를 작성한다.

조정의 효력은 양측 당사자간 동의를 전제로 하고 있어, 조정이 성립되지 않으면 소송 절차로 갈 수 있다.

환자는 소정의 수수료(5천만원 조정신청시 11만원)를 내면 의료과실 여부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감정서를 복사할 수 있어, 조정에 동의하지 않고도 소송에서 유리한 결과를 도출할 가능성이 높다.

의료계 관계자는 "조정단계에 들어서면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조정전치주의가 되지 않으면 감정서를 이용하는 환자와 변호사가 많아질 것"이라며 "중재원은 소송을 위한 전단계로 역할과 기능이 유명무실해질 것"이라고 꼬집었다.

◆상근 의사 임용포기…비상근 정원 절반 미충족

의료중재원의 역할에 핵심적인 의사직 상임위원들이 정족수 절반에 불과한 상황이다.

무과실 보상 부담에 반대하는 산부인과의사회 박노준 회장의 복지부 앞 1인 시위 모습.
상근 상임위원의 경우, 법조인과 의사 모두 정원을 채웠으나 최근 내과 상근위원이 개인적 이유로 갑자기 임용을 포기해 한 자리가 비어있는 상태이다.

비상근 상임위원 채용은 더욱 심각하다.

내과계와 외과계 감정위원과 조정위원 의사 총 60명 중 확정 인원은 30명에 불과하다.

특히 내과 분과별 전문의와 산부인과 전문의 충원이 턱없이 부족해 의료사고 조정 절차에 따른 감정서 작성과 중재 역할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중재원은 개별 접촉을 통해 비상임 위원을 확충한다는 방침이지만 의료계에서 참여 거부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상임위원 기근현상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여진다.

◆의료계 대응 방안…조정거부와 헌법소원 병행

의사협회와 진료과별 의사회는 의료중재원의 조정신청을 거부하는 의료기관 홍보에 주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의료분쟁법에는 조정신청이 제기되면 14일 이내 조정 수용 또는 거부 의사를 표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의료기관 모두 의료분쟁 조정을 거부하면, 중재원 자체가 무기력화 돼 의료계 의견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게 의료계의 시각이다.

또 다른 대응책은 무과실 국가 보상을 위한 헌법소원과 법률 개선 작업이다.

불가항력적 의료사고 보상은 내년 4월 시행이지만 모법에 의료기관 분담을 규정하고 있어 헌법소원에 문제가 없다는 게 의료계의 시각이다.

의료계는 의료분쟁법 하위법령의 개선책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의협 등 의료단체의 기자회견 모습.
더불어 조정전치주의와 감정서 유출 방지책 등 의료분쟁조정법의 허점을 보완한 법 개정을 통한 복지부를 압박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산부인과의사회 김재연 법제이사는 "산과발전협의체는 무과실 분담문제와 별개 사항으로 각개격파를 위한 복지부의 술수"라며 "중재원의 파행을 막기 위해서는 의사 모두가 하나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사고의 피해 구제와 안정적인 진료환경 조성을 목적으로 한 의료분쟁중재원이 의료계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반쪽자리 조직으로 불안한 출발을 보이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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