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 의대 본과 3학년 장진기 씨
"인생이란 비스킷 통이라고 생각하면 돼. 비스킷 통에 여러 가지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는데,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만 자꾸 먹어버리면, 나중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거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라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야기 일겁니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이걸 읽고 깨달은 건 아직 저는 맛없는 비스킷을 먹을 날이 많이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병원실습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된 지금 먹고 있는 비스킷이 제가 살면서 먹은 비스킷 중엔 가장 맛이 없는 것 같네요. 하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도 운 좋게 제가 좋아하는 비스킷이 하나씩은 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맛있었던 비스킷을 하나씩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저희 병원 내과에 멋쟁이 교수님이 한 분 계십니다. 학생 강의나 학회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넥타이가 아니라 항상 예쁜 나비넥타이를 하고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저처럼 사과모양의 전자기기를 좋아하셔서 어딜 가시던 패드나 노트북을 들고 다니세요. 제가 학생 땐 들어오셔서 강의 중간중간에 학생들에게 질문을 쏟아 붓고 가십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교수님의 이미지는 항상 '보우타이에 맥X을 들고 다니시며 질문 많이 하시는 교수님'이였죠.
하지만 병원 실습을 나가니 정 반대였습니다. 질문을 많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많이 '요구하는' 교수님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학생, 인턴, 레지던트, 임상강사 가리지 않고 "질문?"으로 빈 시간을 메우시죠. 항상 분위기는 훈훈하지만 중간에 질문이 끊기는 순간부터 교수님을 제외한 모두의 이마에서 땀이 흐릅니다. 물론 교수님이 한 사람을 보면서 "질문?"이라고 하시기 때문에 큰 혼란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질문을 준비하지 못했거나 준비해온 질문이 다 떨어졌다면 그때부터 머릿속은 복잡해집니다. "아 무슨 질문을 하지? 이건 너무 쉬운 질문 같은데... 아까 누가 무슨 질문 준비해왔더라? 아 아까 들었던 그 질문 내가 써먹어야겠다."라는 생각 끝에 다른 사람이 준비한 질문을 써먹기도 합니다.
여하튼 결론은 항상 교수님 회진 전날에는 뭐라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핸드북, 국시 문제집, 해리슨 등 아무 책이라도 붙잡고 공부하지 않으면 질 높은 질문이 안 나오기 때문에 어찌 보면 교수님의 질문 타임은 아주 훌륭한 교수법입니다. 덕분에 이것저것 공부는 많이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건 지나고 보니 든 생각들이고 사실 당시에는 교수님이 참 원망스럽습니다. '교수님은 다 좋은데 왜 질문을 원하실까, 왜 이렇게 질문 만드는 게 힘들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 마련입니다.
이런 제 생각이 바뀐 건 엉뚱한 곳에서였습니다. 사실 어느 정도인지는 학생인 저로서는 가늠이 안 가지만 이 교수님은 내시경의 한 분야에서 알아주는 전문가여서 어려운 내시경 케이스를 맡아 종종 수술장에서 시술을 하십니다. 내시경 시술 참관이 끝나고 교수님이 딱 장갑을 벗으시자 속으로 '아..'하는 경탄의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다름아닌 교수님의 손이었습니다. 물론 내시경을 하는 많은 교수님들, 의사선생님들도 그렇겠지만 유독 이 교수님의 손 주름은 그 세월을 훨씬 앞서 나가있었습니다.(그 주름에 대해선 질문을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마 계속해서 장갑을 쓰시니 장갑을 한번 끼고 벗을 때 마다 주름이 하나하나씩 늘어났을 겁니다. 평생을 논밭에서 지내신 제 할머니의 손에 맺힌 주름보다 더 많은 주름이 제 눈앞에 보였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왜 그 부분에서 감동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교수님의 모든 점이 멋있어 보이기 시작합니다. 질문시간은 물론 교수님이 설명해주시는 것도 그렇고 교수님의 논문도 멋져 보이고 회진이나 외래 시간도 정말 즐거워집니다.
이렇게 그 주는 저에겐 참 맛있는 비스킷이 되었습니다. 사실 어느 과를 돌던 즐거운 순간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아직은 학생인지라 모든 교수님들이 대단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나비넥타이 교수님과의 시간이 기억에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종종 비스킷 통에서 좋아하는 비스킷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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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야기 일겁니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이걸 읽고 깨달은 건 아직 저는 맛없는 비스킷을 먹을 날이 많이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병원실습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된 지금 먹고 있는 비스킷이 제가 살면서 먹은 비스킷 중엔 가장 맛이 없는 것 같네요. 하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도 운 좋게 제가 좋아하는 비스킷이 하나씩은 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맛있었던 비스킷을 하나씩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저희 병원 내과에 멋쟁이 교수님이 한 분 계십니다. 학생 강의나 학회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넥타이가 아니라 항상 예쁜 나비넥타이를 하고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저처럼 사과모양의 전자기기를 좋아하셔서 어딜 가시던 패드나 노트북을 들고 다니세요. 제가 학생 땐 들어오셔서 강의 중간중간에 학생들에게 질문을 쏟아 붓고 가십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교수님의 이미지는 항상 '보우타이에 맥X을 들고 다니시며 질문 많이 하시는 교수님'이였죠.
하지만 병원 실습을 나가니 정 반대였습니다. 질문을 많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많이 '요구하는' 교수님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학생, 인턴, 레지던트, 임상강사 가리지 않고 "질문?"으로 빈 시간을 메우시죠. 항상 분위기는 훈훈하지만 중간에 질문이 끊기는 순간부터 교수님을 제외한 모두의 이마에서 땀이 흐릅니다. 물론 교수님이 한 사람을 보면서 "질문?"이라고 하시기 때문에 큰 혼란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질문을 준비하지 못했거나 준비해온 질문이 다 떨어졌다면 그때부터 머릿속은 복잡해집니다. "아 무슨 질문을 하지? 이건 너무 쉬운 질문 같은데... 아까 누가 무슨 질문 준비해왔더라? 아 아까 들었던 그 질문 내가 써먹어야겠다."라는 생각 끝에 다른 사람이 준비한 질문을 써먹기도 합니다.
여하튼 결론은 항상 교수님 회진 전날에는 뭐라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핸드북, 국시 문제집, 해리슨 등 아무 책이라도 붙잡고 공부하지 않으면 질 높은 질문이 안 나오기 때문에 어찌 보면 교수님의 질문 타임은 아주 훌륭한 교수법입니다. 덕분에 이것저것 공부는 많이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건 지나고 보니 든 생각들이고 사실 당시에는 교수님이 참 원망스럽습니다. '교수님은 다 좋은데 왜 질문을 원하실까, 왜 이렇게 질문 만드는 게 힘들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 마련입니다.
이런 제 생각이 바뀐 건 엉뚱한 곳에서였습니다. 사실 어느 정도인지는 학생인 저로서는 가늠이 안 가지만 이 교수님은 내시경의 한 분야에서 알아주는 전문가여서 어려운 내시경 케이스를 맡아 종종 수술장에서 시술을 하십니다. 내시경 시술 참관이 끝나고 교수님이 딱 장갑을 벗으시자 속으로 '아..'하는 경탄의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다름아닌 교수님의 손이었습니다. 물론 내시경을 하는 많은 교수님들, 의사선생님들도 그렇겠지만 유독 이 교수님의 손 주름은 그 세월을 훨씬 앞서 나가있었습니다.(그 주름에 대해선 질문을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마 계속해서 장갑을 쓰시니 장갑을 한번 끼고 벗을 때 마다 주름이 하나하나씩 늘어났을 겁니다. 평생을 논밭에서 지내신 제 할머니의 손에 맺힌 주름보다 더 많은 주름이 제 눈앞에 보였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왜 그 부분에서 감동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교수님의 모든 점이 멋있어 보이기 시작합니다. 질문시간은 물론 교수님이 설명해주시는 것도 그렇고 교수님의 논문도 멋져 보이고 회진이나 외래 시간도 정말 즐거워집니다.
이렇게 그 주는 저에겐 참 맛있는 비스킷이 되었습니다. 사실 어느 과를 돌던 즐거운 순간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아직은 학생인지라 모든 교수님들이 대단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나비넥타이 교수님과의 시간이 기억에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종종 비스킷 통에서 좋아하는 비스킷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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