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의대 본과 4학년 정세용 씨
이쯤에서 잠시 삼천포로 빠져보자. 마태복음 19장 24절에 보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구절이 있다. 니체가 그의 저서 '안티크리스트'에서 꼬집은 바와 같이 기독교의 전파는 대부분 하층민이나 배척된 자들, 유대교 내부의 불가촉천민 등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이러한 '청빈'(淸貧, 청렴하면서 가난함) 사상과 관계있을 것이다.
물론 기독교 외에도 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종교가 금욕을 통해 옳은 삶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떼돈'을 번 사람들 중에는, 깊은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도 분명히 있다. 아니 사실, 적지 않은 부자들이 종교인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금욕'을 권하는 종교와, '떼돈'을 같이 가진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일주일에 하루만 '금욕', '금욕' 거리는 위선자로 보아야하는가, 아니면 종교와 정치, 경제의 유착을 의심해 보아야하는가. 글쎄, 두 가지 모두 그들에게는 다소 부당한 평가일 수 있다. 적어도, '떼돈'을 '욕심'으로만 해석해서는 그들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자본주의를 낳은 것은 개신교이다?.
물론, 이 문제를 처음 고민한 것은 필자가 아니다. 로마 황제의 자리에서 금욕의 철학을 전개해 나갔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있었고, 위의 '청빈' 사상을 뒤집고 '청부'(淸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장 칼뱅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03년, 막스 베버는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자본주의의 정신'을 만들었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베버는 상업과 방직업에 성공하고 의회에 진출했던 '부르주아 정치가' 아버지가 있었고, 집안 대대로 공직자와 학자를 배출했던 '금욕적 학자' 어머니가 있었다. 그러한 집안에서 자라나며, 베버가 '떼돈'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가톨릭교도에 비해 개신교도의 경제 활동이 더 활발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직업'(Beruf)을 '신의 부름'(Rufen)으로 파악하는 개신교의 직업관과, 근면성실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직업윤리 사이에, 서로 통하는 면이 있었던 것. 즉, 자신의 직업을 '소명'(기독교 용어,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일)으로 여기고 이에 충실했던 개신교도들은, 그 부지런함을 바탕으로 더 많은 부를 축적했던 것이다.
개신교도들이 '부의 향락' 보다도 중죄시했던 것이 '무위도식'이었고, 종교적 의혹, 도덕적 무력감, 뿐만 아니라 모든 성적인 유혹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한 최고의 금욕 수단이 바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세속적 직업 노동'이었다. 하위 계층을 착취하지 못하면 마치 엉덩이에 뿔이라도 나는 듯이 묘사되던 마르크스의 자본가가 아니라,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명제를 실천적으로 해석하는 베버의 자본가. 욥기의 한 구절을 패러디해 보자면, "시작은 '금욕'이었으나, 그 끝은 '떼돈'이리라", 그것이 바로 베버가 정립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청부' 사상이다.
시작은 금욕이었으나, 그 끝은 떼돈이리라?
"부는 게으름과 죄 많은 향락에의 유혹일 경우에만 윤리적으로 사악한 것이며, 부의 추구도 근심 없는 안일한 삶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만 사악한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직업 의무의 수행으로서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명령되는 바이다."(본문 제 5장, 금욕과 자본주의 정신 中)
그렇듯 베버는 개신교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낳았다고 해석하며, 종교를 바탕으로 문화권을 설명하였다. 한편 유교 사상의 권위자인 하버드대학의 투웨이밍 교수는, 최근 동아시아 5개국(한국,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부상이 유교 사상 덕분이라 설명했다. 서양의 개신교에 해당하는 것이 동아시아의 유교이며, 이것을 베버의 저서에 빗대어 '신 유교 윤리'와 '동아시아 자본주의 정신'이라 표현한 것.
물론, '떼돈'과 '청부'가 같이할 수 있다는 이러한 생각을,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 생각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청부'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떼돈'을 벌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동자 착취와 같은 모순이 생겨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그러한 생산 구조의 모순이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어져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것이라 예언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전 세계를 이념의 대결장으로 만들었던 70여년에 걸친 마르크스의 사상 실험은, 결국 냉전시대의 종결과 함께 실패로 끝났다. 반면 자본주의는 빈익빈 부익부와 같은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음이 명백함에도, 케인즈의 수정 자본주의, 대처와 레이건의 신 자본주의를 거쳐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는 '자본주의 4.0', 따뜻한 자본주의로 나아감과 함께 지금까지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대안을 내 놓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베버의 '청부' 사상은 무너지지 않고 있다.
같은 논리를, 의사에게 적용하는 것이, 무리이겠는가?
'떼돈'과 '청부', '떼돈'과 '의술'
소유욕, 금전욕, 망설이지 않는 영리 충동은 언제나 어느 곳에나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도, 헬레니즘 시대이든 신라 시대이든,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겠는가. 화폐를 사용하는 모든 경제 구조에서, '떼돈'을 벌고 싶다는 마음은 자연히 발생하게 되어있는 것이고, 이를 억누르고 숨긴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이 '떼돈'을 벌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사회 전체적으로 이로운 방향이 되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소 어려운 내용들을 열심히 끌어다 썼지만, 결국 필자가 이전의 글 두 편에서 주장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떼돈'을 벌기 위해서 반드시 노동자 착취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듯이, '떼돈'을 버는 것과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의술'이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이 점을 왜 자꾸 강조하는가. 이전의 글 말미에서,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말을 터부시했던 의사들의 문화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보았다. 받을 만큼도 못 받는 저수가 상황에서도 의사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했고, 결국 의료 제도는 계속해서 왜곡되어 가며 의사의 최선 진료를 가로막는 역할을 해 왔다.
이를 고쳐 보려는 시도는 그저 이기적인 이익 집단의 밥그릇 싸움으로 비춰질 뿐이었고, 이를 피해 가려는 시도들은 '비윤리적인 의사들'이라는 이미지만 더욱 부각시킬 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다 합쳐져, 최종적으로 환자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래서, 이제야 필자의 진짜 주장을 말해보자면 이렇다.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거짓말하지 말자는 것.
독수리 오형제는 없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자. 의사들의 권리는 누가 만들어주고, 누가 존중해줄까.
환자들이 의사들의 권리를 알아서 만들어 주고 존중해줄까? 최근 선택 진료비 축소와 관련해 논란이 일자,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인터뷰에서 대놓고 "의사들의 박탈감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의사가 진료를 하던 중 환자가 휘두른 칼에 6번을 찔리는 일이 생겨도, '의료인 폭행 가중 처벌법'은 환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과한 처사라는 것이 안 대표의 주장이다.
의사를 환자에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포식자로 묘사하는 듯한 그들의 생각도 다소 불편하지만, 환자-의사 관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환자의 대표가, 그렇게 공공연히 의사들을 비난하고 다니는 것은 더욱이나 불편하다. 만약 뒤집어서 의사의 대표가 그렇게 환자를 비난했다가는 아마 칼에 6번 찔리고도, 그래도 싸다고 비난을 들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면 국회의원이 의사의 권리를 지켜줄까. 현재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오제세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은 지난달 28일, 환자가 신청하기만 하면 의사의 동의 없이도 '의료분쟁조정제도'를 진행할 수 있도록 입법하겠다고 밝혔다. 원래 의료계는 이 조정 절차가 의사에게 불합리한 면이 있다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환자와 의사가 모두 동의할 때만 진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2011년 입법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채 3년이 지나기도 전에, 오 위원장은 "의료계의 반대가 많은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이 절차의 진행을 기어코 의사들에게 강제해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의사들에게 있어 다소 언짢은 일이라 해도, 그들을 비난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환자-의사 관계의 본질이 어떻든, 의료 분쟁이 어떻든, 이러한 의료 정책의 입법은 결국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임을 간과할 수가 없다. 의사들이 자신의 불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거나 말거나, 저들은 저들의 목소리를 낼 뿐이다.
결국, 의사의 권리는 의사가 스스로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료인 폭행 가중 처벌법'의 제정이 안전한 의료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더 나은 진료를 할 수 있게 할 것이라 판단하는가? 그럼 그렇게 확신하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의사이고, 그 말을 하려고 할 사람도 의사 밖에 없다. 적어도 환자들이나 국회의원들은 이와 반대로 생각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의사는 그저 의학에만 집중을 하는 것이 윤리적이고, 의사의 권리든 의료 제도든 알아서, 합리적으로, 자알 생길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의료분쟁조정제도'만 해도 그렇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이 절차는 정말 의료계가 말하는 것처럼 의사에게 불합리한 면이 실재하는가. 이 절차는 정말 불필요한 의료 소송을 줄이자는 본래 법의 취지에 부합하는가. 그 수많은 논점들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알아서 합리적으로 잘 판단해 줄 거라고, 그러니 의사는 굳이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독수리 오형제는 없다. 세계의 평화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작은 권리 하나도 자신이 주장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들의 권리 주장이 의사들의 이기적인 행동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살리고 싶은 마음과 공존할 수 있으며, 환자를 위한 최선의 진료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이전의 글 두 편과 앞의 문단에서 막스 베버까지 동원하면서 필자가 지겹도록 역설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의사들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항상 논란이 되는 '의사 파업'이나 과격한 폭력 시위만이 그 유일한 방법이 아니지 않은가. 주지하다시피, 여기는 북한도 아니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니 말이다. 자신의 진료 활동을 잘 수행하면서도, 대국민 홍보를 하거나 서명 운동, 캠페인 등을 하는 방법도 있고, 선거인으로서든 피선거인으로서든 여러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도 있다.
아니면, 필자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자신의 직업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으면서, 평소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전혀 과격하지도 않고, 전혀 무리가 되지도 않는 방법.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거짓말하지 말자는 것.
"난 떼돈을 벌 거야!"
정말 떼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진심으로 봉사와 헌신을 실천하고 계시는 많은 의사분들이 있고, 그러한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지 않고 있는 의사분들에게도 똑같은 경의를 표하고 싶다, 베버의 '청부' 사상을 지키고 있는 분이라면 말이다.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자신의 직업을 하루하루 열심히 수행하는 의사분들에게 왜 돌을 던지느냐는 말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 그것이 아주 정당하고 당연한 권리라고 하더라도, 당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주장에 자신의 욕심이나 이기심이 전혀 섞이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다만 집단이나 정치의 단계로 와서는 다들 그러한 주장을 곧잘 하는 편인데, 의사들에서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러한 주장을 많이 꺼려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필자가 계속 말하는 것이 '떼돈'이다. 떼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을 수가 없는데도, 이름 여섯 자 밖에는 아는 것이 없는 '히포크라테스'를 억지로 쭈물쭈물 외울 필요가 무엇인가. 이러한 변화가 결국, '의료인 폭행 가중 처벌법'이든 '의료분쟁조정제도'든, 최선의 진료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세 편의 글을 통해, 총 세 가지를 보였다. 첫 번째로 "난 떼돈을 벌 거야!"는 말을 터부시하는 의사들의 문화가 의료 제도 왜곡을 거쳐 환자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였고, 두 번째로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함으로써 이러한 것들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말을 하는 것이,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것과 전혀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까지.
이제 마지막 남은 한 편에서는, 왜 필자가 굳이 '"난 떼돈을 벌 거야!"라고 하는 방법을 주장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글을 정리하도록 하겠다.
[참고 문헌]
1.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박종선 역, 도서출판 世界, 1987
2. 강성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해제, 서울대학교 철학 사상 연구소, 2006
3. 홍성기, 현대사회과학 방법론의 기초, 네이버 캐스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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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독교 외에도 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종교가 금욕을 통해 옳은 삶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떼돈'을 번 사람들 중에는, 깊은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도 분명히 있다. 아니 사실, 적지 않은 부자들이 종교인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금욕'을 권하는 종교와, '떼돈'을 같이 가진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일주일에 하루만 '금욕', '금욕' 거리는 위선자로 보아야하는가, 아니면 종교와 정치, 경제의 유착을 의심해 보아야하는가. 글쎄, 두 가지 모두 그들에게는 다소 부당한 평가일 수 있다. 적어도, '떼돈'을 '욕심'으로만 해석해서는 그들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자본주의를 낳은 것은 개신교이다?.
물론, 이 문제를 처음 고민한 것은 필자가 아니다. 로마 황제의 자리에서 금욕의 철학을 전개해 나갔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있었고, 위의 '청빈' 사상을 뒤집고 '청부'(淸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장 칼뱅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03년, 막스 베버는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자본주의의 정신'을 만들었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베버는 상업과 방직업에 성공하고 의회에 진출했던 '부르주아 정치가' 아버지가 있었고, 집안 대대로 공직자와 학자를 배출했던 '금욕적 학자' 어머니가 있었다. 그러한 집안에서 자라나며, 베버가 '떼돈'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가톨릭교도에 비해 개신교도의 경제 활동이 더 활발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직업'(Beruf)을 '신의 부름'(Rufen)으로 파악하는 개신교의 직업관과, 근면성실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직업윤리 사이에, 서로 통하는 면이 있었던 것. 즉, 자신의 직업을 '소명'(기독교 용어,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일)으로 여기고 이에 충실했던 개신교도들은, 그 부지런함을 바탕으로 더 많은 부를 축적했던 것이다.
개신교도들이 '부의 향락' 보다도 중죄시했던 것이 '무위도식'이었고, 종교적 의혹, 도덕적 무력감, 뿐만 아니라 모든 성적인 유혹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한 최고의 금욕 수단이 바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세속적 직업 노동'이었다. 하위 계층을 착취하지 못하면 마치 엉덩이에 뿔이라도 나는 듯이 묘사되던 마르크스의 자본가가 아니라,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명제를 실천적으로 해석하는 베버의 자본가. 욥기의 한 구절을 패러디해 보자면, "시작은 '금욕'이었으나, 그 끝은 '떼돈'이리라", 그것이 바로 베버가 정립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청부' 사상이다.
시작은 금욕이었으나, 그 끝은 떼돈이리라?
"부는 게으름과 죄 많은 향락에의 유혹일 경우에만 윤리적으로 사악한 것이며, 부의 추구도 근심 없는 안일한 삶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만 사악한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직업 의무의 수행으로서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명령되는 바이다."(본문 제 5장, 금욕과 자본주의 정신 中)
그렇듯 베버는 개신교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낳았다고 해석하며, 종교를 바탕으로 문화권을 설명하였다. 한편 유교 사상의 권위자인 하버드대학의 투웨이밍 교수는, 최근 동아시아 5개국(한국,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부상이 유교 사상 덕분이라 설명했다. 서양의 개신교에 해당하는 것이 동아시아의 유교이며, 이것을 베버의 저서에 빗대어 '신 유교 윤리'와 '동아시아 자본주의 정신'이라 표현한 것.
물론, '떼돈'과 '청부'가 같이할 수 있다는 이러한 생각을,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 생각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청부'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떼돈'을 벌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동자 착취와 같은 모순이 생겨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그러한 생산 구조의 모순이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어져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것이라 예언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전 세계를 이념의 대결장으로 만들었던 70여년에 걸친 마르크스의 사상 실험은, 결국 냉전시대의 종결과 함께 실패로 끝났다. 반면 자본주의는 빈익빈 부익부와 같은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음이 명백함에도, 케인즈의 수정 자본주의, 대처와 레이건의 신 자본주의를 거쳐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는 '자본주의 4.0', 따뜻한 자본주의로 나아감과 함께 지금까지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대안을 내 놓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베버의 '청부' 사상은 무너지지 않고 있다.
같은 논리를, 의사에게 적용하는 것이, 무리이겠는가?
'떼돈'과 '청부', '떼돈'과 '의술'
소유욕, 금전욕, 망설이지 않는 영리 충동은 언제나 어느 곳에나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도, 헬레니즘 시대이든 신라 시대이든,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겠는가. 화폐를 사용하는 모든 경제 구조에서, '떼돈'을 벌고 싶다는 마음은 자연히 발생하게 되어있는 것이고, 이를 억누르고 숨긴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이 '떼돈'을 벌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사회 전체적으로 이로운 방향이 되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소 어려운 내용들을 열심히 끌어다 썼지만, 결국 필자가 이전의 글 두 편에서 주장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떼돈'을 벌기 위해서 반드시 노동자 착취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듯이, '떼돈'을 버는 것과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의술'이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이 점을 왜 자꾸 강조하는가. 이전의 글 말미에서,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말을 터부시했던 의사들의 문화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보았다. 받을 만큼도 못 받는 저수가 상황에서도 의사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했고, 결국 의료 제도는 계속해서 왜곡되어 가며 의사의 최선 진료를 가로막는 역할을 해 왔다.
이를 고쳐 보려는 시도는 그저 이기적인 이익 집단의 밥그릇 싸움으로 비춰질 뿐이었고, 이를 피해 가려는 시도들은 '비윤리적인 의사들'이라는 이미지만 더욱 부각시킬 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다 합쳐져, 최종적으로 환자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래서, 이제야 필자의 진짜 주장을 말해보자면 이렇다.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거짓말하지 말자는 것.
독수리 오형제는 없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자. 의사들의 권리는 누가 만들어주고, 누가 존중해줄까.
환자들이 의사들의 권리를 알아서 만들어 주고 존중해줄까? 최근 선택 진료비 축소와 관련해 논란이 일자,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인터뷰에서 대놓고 "의사들의 박탈감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의사가 진료를 하던 중 환자가 휘두른 칼에 6번을 찔리는 일이 생겨도, '의료인 폭행 가중 처벌법'은 환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과한 처사라는 것이 안 대표의 주장이다.
의사를 환자에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포식자로 묘사하는 듯한 그들의 생각도 다소 불편하지만, 환자-의사 관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환자의 대표가, 그렇게 공공연히 의사들을 비난하고 다니는 것은 더욱이나 불편하다. 만약 뒤집어서 의사의 대표가 그렇게 환자를 비난했다가는 아마 칼에 6번 찔리고도, 그래도 싸다고 비난을 들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면 국회의원이 의사의 권리를 지켜줄까. 현재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오제세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은 지난달 28일, 환자가 신청하기만 하면 의사의 동의 없이도 '의료분쟁조정제도'를 진행할 수 있도록 입법하겠다고 밝혔다. 원래 의료계는 이 조정 절차가 의사에게 불합리한 면이 있다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환자와 의사가 모두 동의할 때만 진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2011년 입법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채 3년이 지나기도 전에, 오 위원장은 "의료계의 반대가 많은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이 절차의 진행을 기어코 의사들에게 강제해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의사들에게 있어 다소 언짢은 일이라 해도, 그들을 비난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환자-의사 관계의 본질이 어떻든, 의료 분쟁이 어떻든, 이러한 의료 정책의 입법은 결국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임을 간과할 수가 없다. 의사들이 자신의 불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거나 말거나, 저들은 저들의 목소리를 낼 뿐이다.
결국, 의사의 권리는 의사가 스스로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료인 폭행 가중 처벌법'의 제정이 안전한 의료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더 나은 진료를 할 수 있게 할 것이라 판단하는가? 그럼 그렇게 확신하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의사이고, 그 말을 하려고 할 사람도 의사 밖에 없다. 적어도 환자들이나 국회의원들은 이와 반대로 생각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의사는 그저 의학에만 집중을 하는 것이 윤리적이고, 의사의 권리든 의료 제도든 알아서, 합리적으로, 자알 생길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의료분쟁조정제도'만 해도 그렇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이 절차는 정말 의료계가 말하는 것처럼 의사에게 불합리한 면이 실재하는가. 이 절차는 정말 불필요한 의료 소송을 줄이자는 본래 법의 취지에 부합하는가. 그 수많은 논점들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알아서 합리적으로 잘 판단해 줄 거라고, 그러니 의사는 굳이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독수리 오형제는 없다. 세계의 평화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작은 권리 하나도 자신이 주장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들의 권리 주장이 의사들의 이기적인 행동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살리고 싶은 마음과 공존할 수 있으며, 환자를 위한 최선의 진료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이전의 글 두 편과 앞의 문단에서 막스 베버까지 동원하면서 필자가 지겹도록 역설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의사들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항상 논란이 되는 '의사 파업'이나 과격한 폭력 시위만이 그 유일한 방법이 아니지 않은가. 주지하다시피, 여기는 북한도 아니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니 말이다. 자신의 진료 활동을 잘 수행하면서도, 대국민 홍보를 하거나 서명 운동, 캠페인 등을 하는 방법도 있고, 선거인으로서든 피선거인으로서든 여러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도 있다.
아니면, 필자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자신의 직업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으면서, 평소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전혀 과격하지도 않고, 전혀 무리가 되지도 않는 방법.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거짓말하지 말자는 것.
"난 떼돈을 벌 거야!"
정말 떼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진심으로 봉사와 헌신을 실천하고 계시는 많은 의사분들이 있고, 그러한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지 않고 있는 의사분들에게도 똑같은 경의를 표하고 싶다, 베버의 '청부' 사상을 지키고 있는 분이라면 말이다.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자신의 직업을 하루하루 열심히 수행하는 의사분들에게 왜 돌을 던지느냐는 말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 그것이 아주 정당하고 당연한 권리라고 하더라도, 당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주장에 자신의 욕심이나 이기심이 전혀 섞이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다만 집단이나 정치의 단계로 와서는 다들 그러한 주장을 곧잘 하는 편인데, 의사들에서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러한 주장을 많이 꺼려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필자가 계속 말하는 것이 '떼돈'이다. 떼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을 수가 없는데도, 이름 여섯 자 밖에는 아는 것이 없는 '히포크라테스'를 억지로 쭈물쭈물 외울 필요가 무엇인가. 이러한 변화가 결국, '의료인 폭행 가중 처벌법'이든 '의료분쟁조정제도'든, 최선의 진료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세 편의 글을 통해, 총 세 가지를 보였다. 첫 번째로 "난 떼돈을 벌 거야!"는 말을 터부시하는 의사들의 문화가 의료 제도 왜곡을 거쳐 환자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였고, 두 번째로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함으로써 이러한 것들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말을 하는 것이,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것과 전혀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까지.
이제 마지막 남은 한 편에서는, 왜 필자가 굳이 '"난 떼돈을 벌 거야!"라고 하는 방법을 주장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글을 정리하도록 하겠다.
[참고 문헌]
1.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박종선 역, 도서출판 世界, 1987
2. 강성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해제, 서울대학교 철학 사상 연구소, 2006
3. 홍성기, 현대사회과학 방법론의 기초, 네이버 캐스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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