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교수가 되지 못한 자…내 이름은 전임의다"

발행날짜: 2015-01-05 06:05:35
  • 특별기획-의생교수 보며 걸어 온 20년…종신 계약의 날을 꿈꾼다

"야 이 XX야, 여적 안 열어 놓고 뭐한 거야. 짬밥 좀 먹었다고 퍼졌냐? 제대로 못해?"

수술방 차고 들어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했다. 역시 김 교수다. 9시 10분에 들어온다더니 왜 9시도 안돼서 수술방에 들어와서는 개복 안해놨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뭔가 억울하지만 어쩔 수 있나. 나는 을 중의 을인 임상 강사 2년차. 환자들은 나를 교수님이라고 부르지만 교수들에게 난 그저 '야', '이 XX'일 뿐이다.

"죄송합니다. 10분에 들어온다고 하셔서 준비중이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마치겠습니다."

머리가 땅에 닿을때까지 인사를 해봐도 별 수 없다는건 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최소 30분 짜리다. 전공의 애들이랑 간호사들도 있는데 정말이지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꺼져 이 XX야. 옆방이나 제대로 해놓고 10시에 마무리나 하러 와. 너 논문 레퍼런스는 찾아 놓은거야? 아침까지 보내라는 말 못 들었어?"

아 맞다. 어제 꼬박 밤을 새워 만들어 놓고서 메일 보내는걸 깜빡했다. 하지만 나도 벌써 병원 밥이 10년이다. 절대 당황하지 않는다.

"보시기 편하게 출력해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보조 책상에 놔둬 눈에 안 띄셨나 봅니다. 결재 서류 옆 쪽에 놨는데…."

쫓겨나 듯 수술방에서 나와 문이 닫히자 마자 눈썹이 휘날리게 뛴다. 수술복에 컴포트화를 신었지만 그게 대수인가. 정확히 10분 내에 출력해서 결재 서류 옆에 놓고 컴백해야 한다.

5년동안 돼지 우리 같던 숙소와 학습실에서 벗어나 드디어 하나 얻어낸 책상. 고물 노트북에 잉크젯 프린터가 전부지만 그래도 병원 안에 유일한 내 공간이다.

'지직… 지직 지지직….'

이 놈의 고물 프린터. 정말이지 더럽게 느려 터졌다. 속은 타들어 가는데 이 놈은 아는지 모르는지 차곡차곡 한 줄씩만 출력을 하고 있다.

문득 돌아본 책상 한구석에 학사모를 쓴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이 눈에 띈다. 전공의때 부터 가지고 다녔으니 이제 6년이나 세워놓은 셈인가.

그래 저런 때도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대 합격증을 받았을때. 그 때의 벅찬 감격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친구들의 부러운 눈길. 동네 방네 전화를 돌리시던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눈빛.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내 이름이 플래카드에 걸렸고 수도 없이 쏟아지는 축하 전화는 덤이었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책상 앞에만 붙어있던 그 고통과 인내의 날을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슈바이처 만큼은 아니지만 좋은 의사가 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좋은 의사에 대해 고민을 멈췄던 시간이. 의대 6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누가 캠퍼스의 낭만을 논했는가. 내게 남은건 쪽지 시험에 대한 악몽 뿐이다.

인턴, 전공의 시절은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다. 5년간 나는 병원에 서식하는 '인간'이라는 형상만 지닌 미생물이었다. 아무도 나를 의사로 봐주지 않았고 내 호칭은 늘 '야' 또는 '너' 였다.

이름을 찾은 것은 임상 강사에 채용된 후 부터였다. 갑자기 불려지는 '선생님', '교수님' 호칭이 그렇게 낯설기만 했던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래 나는 의사였다.

이제부터 내 인생이 시작되는구나 희망에 부풀었다. 다시 한번 좋은 의사에 대해 고민도 시작했다. 그래 나는 이제 전문의다. 그것도 국내 굴지 대학병원에서 '교수님'이라고 불리는 전문의다.

그 희망은 통장에 찍힌 첫 월급을 보고 처참히 무너졌다. 310만원. 의대 6년, 인턴, 전공의 5년, 공중보건의사 3년을 지나 '교수님'이라고 불리는데 까지 14년이 걸렸는데 고작 300만원이라니.

처음 월급 통장을 보던 와이프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래 몰랐겠지. 전문의 월급이 이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장모님이 내 월급을 모르시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와이프가 차마 얘기를 못한 것일게다. 덕분에 내 월급은 나와 와이프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밖에서 통용되는 '교수'와 '전문의'라는 타이틀은 어마어마하다. 하다 못해 친척들 경조사에 부조금도 조금 더 생각해야 하고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계산은 내 몫이다.

장모님 여행 비용도 늘 내가 부담한다. 의사 사위가 여행을 보내줬다는 자랑은 장모님 인생 최대의 행복이다. 덕분에 마이너스 통장의 수렁은 점점 더 깊어만 가지만 아무도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한다.

혹여 계산을 피해볼까 구두끈이라고 묶는 날에는 쫌팽이로 찍히기 쉽다. 병원 밖의 사람들에게 전문의는 엄청난 월급을 받는 부르조아로 통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것은 나도 언젠가는 교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하지만 그 희망으로 버티는 순간은 몇 분도 되지 않는다.

"야 이 XX야. 너 어디갔어? 너 오늘 왜 이러냐? 내 밑에 있기 싫어? 언제든지 얘기해."

젠장. 10분안에는 찾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화장실 왔다고 하기에는 시간이 안 맞는다.

"수술방 나오다 넘어져 수술복이 찢어졌습니다. 여유분이 없어 받아서 가는 중입니다. 금방 도착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아 정말이지 내가 전공의도 아니고. 솔직히 월급 300만원 주면서 뭘 이렇게 시키는지 모르겠다.

이번 달 당직 스케줄만 봐도 그렇다. 어떻게 임상 강사가 전공의보다 당직을 더 설수가 있는지 나는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다.

"선배님 오늘 당직이시죠? 고생하세요."

이 말 남기고 수술방에서 유유히 사라지는 전공의를 보면 정말이지 피가 거꾸로 솟는다.

내가 수련받을때만 하더라도 전공의는 하찮은 미생물에 불과했다. 이리 저리 치이는대로 굴러다녀야 했고 조용히 숨만 쉬며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 전공의들은 상전이 따로 없다. 특히 우리 외과는 전공의가 없다보니 교수들도 업어 키운다. 괜히 한번 쥐어박았다가는 고소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그러다보니 당직도, 입원 환자 관리도 다 내 몫이다. 요즘은 주당 80시간제니 뭐니 해서 휴가도 잘 챙겨간다. 그럼 소는 누가 키우나. 당연히 나다.

전공의도 80시간 이상 근무하지 못하게 한다는데 나는 왜 100시간씩 일을 하는 것일까. 그런데도 왜 김 교수는 나만 이렇게 못살게 구는 것일까.

차라리 나보고 돈을 벌라고 하면 마음은 편하겠다. 그래 다 양보하고 당직만 서도 된다고 해도 마음이 편하겠다.

하지만 병원은 전쟁터다. 수십명의 전임의들이 교수라는 단 한자리를 향해 목숨 걸고 뛰어나간다. 필요하다면 논문 대필이 문제가 아니다. 운전기사에 심부름꾼에 필요하다면 얼굴을 가린 쉐도우 닥터 노릇도 해야 한다.

15년을 넘게 꾼 꿈이 무너지는 것은 단 한순간이다. 교수한테 한번 찍히면 그 날로 아웃이다. 근근히 살아남아도 바늘 구멍을 통과하지 못한 펠로우는 쓸데없이 스펙만 높아 취업도 힘든 전문의가 될 뿐이다.

그나마 다행히 2년 뒤 정년 퇴임하는 교수가 둘이나 있다. 어떻게든 그때까지 버티면 혹시나 그 자리가 나에게 돌아올 수 있다. 이를 악물고 2년을 버텨야 하는 이유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묵묵히 쉐도우 닥터로 살아가야 한다. 10분안에 뛰어가서 옆 방 환자 수술 준비를 해놓지 않으면 나는 오늘이라도 짐을 싸야 할지도 모른다.

'우웅 우웅' 또 핸드폰이 울린다. 불과 전화 끊은지 몇 분이나 됐다고.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죽느냐 사느냐 보다 더한 고민이다. 하지만 어짜피 올 때까지 전화하겠지.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

"네 교수님. 거의 다 왔습니다. 수술복 갈아입고 바로 들어갑니다. 3번방 먼저 정리하고 4번방으로 가겠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전공의 6년차면 어떠냐. 월급이 300만원이면 어떠냐. 지금은 교수 인듯 교수 같은 교수 아닌 나지만 언젠가 교수 명패를 받아드는 날 나도 외치게 될 것이다. 이제야 '완생'의 길에 발을 딛었노라고.

*이 기사는 취재 결과를 바탕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건을 에피소드로 재구성한 것으로 특정 병원이나 인물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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