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페인으로 간다[9]
한 지붕 세 가족의 코르도바(1)
여행 5일째. 조형진 가이드와 함께 하는 첫 번째 아침이다. 첫 번째 아침을 강조하는 이유는 참 독특한 그의 스타일 때문이다.
소지품, 특히 여권을 분명히 챙겼는지 확인하고서 버스를 출발시킨 그는 우선 가벼운 스트레칭을 소개한다. 사무실에서 하는 간단한 스트레칭을 연상하면 좋겠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팔을 위로 뻗어 좌우로 기울이는 동작들이다. 이날부터 스페인을 떠나는 날까지 버스가 출발하면 일상처럼 하게 된 이 스트레칭은 잠자리에서 겨우 빠져나와 아직 풀리지 않은 몸이 자연스럽게 버스에 적응하도록 만든다. 회사에서 온 단체여행팀은 휴게소에 들르기라도 하면 빙 둘러서서 체조를 하기도 한단다.
스트레칭에 이어 우리가 여행하게 될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모로코의 일반형황을 요약해주었다. 이어서 아주 수줍어하면서 젊었을 적 꿈꾸었던 DJ 노릇을 해보겠다고 했다. 일행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속에 스페인 가이드계의 떠오르는 별, '조형진과 함께 하는 아침 음악방송'을 시작한 것이다.
첫 곡은 아르페지오와 트레몰로주법을 감상하는 <스페니시 로망스>였다. 기타가 스페인에서 기원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센스있는 선곡이다. 이어서 후아킨 로드리게스의 <아란페이스협주곡>이 이어지고, 스페인 사람들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는 노래, <케 세라 세라>로 음악방송을 마쳤다. 길지 않은 방송(?)시간이지만 스페인과 스페인 사람을 이해하는데 일조하는 것 같다.
스페인에 뿌리를 내린지 벌써 10년차가 되고 있다는 조형진 가이드는 스페인에 대한 느낌을 '땅은 프라다요, 공기는 샤넬이며, 하늘은 루이비통'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살기에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에 사는 한국인들은 그리 많지는 않아서 스페인 본토에 약 1200명, 그리고 라스팔마스에 1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한다.
코르도바에 가까워지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마치 윈도우 초기화면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밀밭이라고 한다. 지금은 수확이 끝난 탓인지 흙빛이지만 봄이면 꼭 닮았을 것 같다. 인구 32만 명의 코르도바는 안달루시아 지방에 속하는 코르도바주의 주도이다. 카르타고 사람들이 세웠다고 짐작되며 카르타고가 포에니전쟁에서 패한 뒤에 로마로 편입되었을 때 번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가 멸망한 다음에 들어선 서고트족의 지배시절인 6~8세기 초에 쇠퇴의 길을 걷다가, 711년 무어인들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코르도바가 재건된 것은 이곳이 후(後) 우마이야왕조의 수도가 되면서이다. 아라비아반도의 패권을 아바스왕조에게 내준 우마이야왕조의 유일한 생존자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까지 도망쳐 스페인 이슬람교 세력의 최고 지도자가 됐고, 756년에는 왕조를 열어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가 향하고 있는 코르도바 메스키타는 아브드 아르 라흐만 1세가 짓기 시작해 세 차례에 걸쳐 확장되면서 아부 아미르 알 만수르에 의해 완공됐다. 모두 2만5천명의 무슬림이 동시에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이 된 것이다.
929년에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무함마드의 전통을 이어받아 스스로를 서양의 칼리프라고 선언하면서 코르도바는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됐는데, 런던이나 파리가 겨우 3만의 인구였던 10세기 무렵 코르도바는 100만 인구를 자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천년을 이어간 왕조가 없었듯이 11세기 초 발생한 내전이 격화되면서 1031년 코르도바 칼리프가 와해됐고, 그 뒤로 도시마다 타이파스라고 부르는 이슬람 군소왕국들이 난립했다. 타이파스 왕국들은 공식적으로는 아랍어를 사용했지만 각자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관용적 문화정책을 폈기 때문에 문화적 이질감을 줄이면서 무어양식이 스페인양식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코르도바 시내로 들어선 버스가 메스키타의 건너편에 섰다. 강 건너 보이는 메스키타는 옅은 흙색으로, 위압적이거나 장엄한 장소라기보다는 친근한 느낌을 준다. 무슬림에게 기도는 일상적인 일이라서 기도를 하는 장소 역시 일상에 가까운 모습으로 지었을까 싶다. 로마시대에 지었다는 다리는 한눈에도 탄탄해 보인다.
다리를 건너면서 성수대교를 떠올린 것은 역시 세월호사고의 후유증일까? 이곳에서 만나는 집시들이 때로는 아기를 던져주는데, 아이를 받아들고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지갑을 훔친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는 나름대로의 대책을 궁리했다. 메스키타를 돌아보는 내내 아내와 팔짱을 끼고 다니기로 했다. 아기를 받아줄 팔이 없다는 표시를 한 셈이다.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팔짱을 끼고 다닌 시간보다 더 오래 팔짱을 껴본 것 같다.
역시 김희곤 교수의 <스페인은 건축이다>에서 코르도바 메스키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코르도바 메스키타는 흰색과 빨간색이 교대로 배열되는 독특한 도벨라스 양식으로 지어진 대표적인 건축물이라고 한다. 785년부터 짓기 시작한 메스키타는 원래 서고트인들이 교회를 세웠던 장소였다.
매스키타에 입장하면 서고트인들의 산 비센테(San Vicente)교회의 지하유적을 볼 수 있다. 무슬림들은 메카에서 짓던 사원형식을 고집하지 않고 이민족이 남긴 교회의 주춧돌과 기둥, 건축양식까지 고스란히 이용해 전형적인 교회의 평면구조를 갖춘 새로운 칼리프양식의 회교사원을 건축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조형진 가이드는 메스키타를 세우는데 들어간 기둥들은 이베리아 반도에 흩어져 있던 신전의 기둥을 뽑아다 쓴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기둥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기둥바닥의 깊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무너진 로마신전의 기둥을 재활용한 것이 옳은지 아니면 메스키타를 세우기 위해 로마신전의 기둥을 뽑아낸 것이 옳은지 헷갈린다.
회교사원은 기본적으로 기도소와 정원 그리고 미나렛이라고 부르는 뾰족탑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대개 '미흐랍'(Mihrab, 메카를 향해 있는 벽감(璧鑑) 형태의 작은 기도실)의 구석에 만들어지는 미나렛(minaret)은 정방형이며 장식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다. 규모가 큰 회교사원에 세워지는 미나렛은 아랍어로 '등대'를 의미한다.
사원에 소속된 무아진(mu'adhdhin)이 올라 하루 다섯 차례의 기도시간과 금요일의 공중예배를 알리는 아잔을 부르는 곳이다. 그런데 코르도바 매스키타의 미나렛에 종이 매달려 있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997년 산티아고 델 콤포스텔라를 침략한 알 만수르가 그곳의 대성당에서 떼어왔다는 종일까? 아니면 이곳에 성당을 만든 뒤에 걸어놓은 것일까?
회교사원의 정원에는 분수가 설치돼 있다. 무슬림들은 우리가 느끼는 다섯 감각이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라고 믿기 때문에 기도소에 들어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매스키타 정원의 분수 주변에는 올리브나무와 오렌지나무를 심어 햇빛을 가렸고, 정원을 돌아가면서 아치회랑을 두었다.
기도소 내부로 들어가면 먼저 끝없이 늘어서있는 기둥들과 기둥을 연결하는 이중의 아치에 압도된다. 벽돌 크기의 석회암과 붉은 벽돌을 교대로 쌓아 아래쪽에는 말발굽 모양으로, 위쪽에는 반원형으로 아치를 만들었다. 한편 천장 곳곳에는 원형 돔을 설치해 이중 아치에 빛이 스며들도록 해서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기도소의 북쪽 끝에는 알라의 방향을 가리키는 키블라가 설치되었고, 그 안에 미흐랍을 두었다. 키블라와 미흐랍의 벽은 자주색, 노란색, 연두색, 흰색, 검은색 타일을 조각내어 장식했는데, 그 문양들은 그라나다에서 설명한 아라베스크, 기하 그리고 캘리그래피로 구성돼 있다.
1236년 코르도바가 가톨릭 연합세력에 점령되고 세월이 흘러 1523년에 코르도바의 대주교는 메스키타를 성당으로 개조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코르도바 주민들이 공사를 막기 위해 끈질진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메스키타 한 가운데 세워진 기둥 4줄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대성당을 만들었다.
메스키타를 방문한 카를로스국왕은 대주교에게 "그대가 만든 것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대가 파손한 것은 이곳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것이다."라고 탄식했다고 하는데, 덕분에 이 사건을 계기로 그라나다의 알람브라궁전이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한다.
메스키타가 완공됐을 때 1013개였던 기둥 가운데 856개가 남아 메키스타의 화려한 모습을 전하고는 있지만, 기도소의 많은 공간이 가톨릭 성물을 전시하는 장소로 바꾸어 놓았다. 뿐만 아니라 메스키타를 가톨릭에게 내어주고 작은 기도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무슬림의 입장에서 보면 이슬람의 위대한 유산이 유린되고 있는 셈이다. 코르도바 메키스타는 이슬람과 가톨릭의 기묘한 동거 현장이다.
여행 5일째. 조형진 가이드와 함께 하는 첫 번째 아침이다. 첫 번째 아침을 강조하는 이유는 참 독특한 그의 스타일 때문이다.
소지품, 특히 여권을 분명히 챙겼는지 확인하고서 버스를 출발시킨 그는 우선 가벼운 스트레칭을 소개한다. 사무실에서 하는 간단한 스트레칭을 연상하면 좋겠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팔을 위로 뻗어 좌우로 기울이는 동작들이다. 이날부터 스페인을 떠나는 날까지 버스가 출발하면 일상처럼 하게 된 이 스트레칭은 잠자리에서 겨우 빠져나와 아직 풀리지 않은 몸이 자연스럽게 버스에 적응하도록 만든다. 회사에서 온 단체여행팀은 휴게소에 들르기라도 하면 빙 둘러서서 체조를 하기도 한단다.
스트레칭에 이어 우리가 여행하게 될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모로코의 일반형황을 요약해주었다. 이어서 아주 수줍어하면서 젊었을 적 꿈꾸었던 DJ 노릇을 해보겠다고 했다. 일행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속에 스페인 가이드계의 떠오르는 별, '조형진과 함께 하는 아침 음악방송'을 시작한 것이다.
첫 곡은 아르페지오와 트레몰로주법을 감상하는 <스페니시 로망스>였다. 기타가 스페인에서 기원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센스있는 선곡이다. 이어서 후아킨 로드리게스의 <아란페이스협주곡>이 이어지고, 스페인 사람들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는 노래, <케 세라 세라>로 음악방송을 마쳤다. 길지 않은 방송(?)시간이지만 스페인과 스페인 사람을 이해하는데 일조하는 것 같다.
스페인에 뿌리를 내린지 벌써 10년차가 되고 있다는 조형진 가이드는 스페인에 대한 느낌을 '땅은 프라다요, 공기는 샤넬이며, 하늘은 루이비통'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살기에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에 사는 한국인들은 그리 많지는 않아서 스페인 본토에 약 1200명, 그리고 라스팔마스에 1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한다.
코르도바에 가까워지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마치 윈도우 초기화면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밀밭이라고 한다. 지금은 수확이 끝난 탓인지 흙빛이지만 봄이면 꼭 닮았을 것 같다. 인구 32만 명의 코르도바는 안달루시아 지방에 속하는 코르도바주의 주도이다. 카르타고 사람들이 세웠다고 짐작되며 카르타고가 포에니전쟁에서 패한 뒤에 로마로 편입되었을 때 번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가 멸망한 다음에 들어선 서고트족의 지배시절인 6~8세기 초에 쇠퇴의 길을 걷다가, 711년 무어인들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코르도바가 재건된 것은 이곳이 후(後) 우마이야왕조의 수도가 되면서이다. 아라비아반도의 패권을 아바스왕조에게 내준 우마이야왕조의 유일한 생존자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까지 도망쳐 스페인 이슬람교 세력의 최고 지도자가 됐고, 756년에는 왕조를 열어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가 향하고 있는 코르도바 메스키타는 아브드 아르 라흐만 1세가 짓기 시작해 세 차례에 걸쳐 확장되면서 아부 아미르 알 만수르에 의해 완공됐다. 모두 2만5천명의 무슬림이 동시에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이 된 것이다.
929년에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무함마드의 전통을 이어받아 스스로를 서양의 칼리프라고 선언하면서 코르도바는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됐는데, 런던이나 파리가 겨우 3만의 인구였던 10세기 무렵 코르도바는 100만 인구를 자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천년을 이어간 왕조가 없었듯이 11세기 초 발생한 내전이 격화되면서 1031년 코르도바 칼리프가 와해됐고, 그 뒤로 도시마다 타이파스라고 부르는 이슬람 군소왕국들이 난립했다. 타이파스 왕국들은 공식적으로는 아랍어를 사용했지만 각자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관용적 문화정책을 폈기 때문에 문화적 이질감을 줄이면서 무어양식이 스페인양식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코르도바 시내로 들어선 버스가 메스키타의 건너편에 섰다. 강 건너 보이는 메스키타는 옅은 흙색으로, 위압적이거나 장엄한 장소라기보다는 친근한 느낌을 준다. 무슬림에게 기도는 일상적인 일이라서 기도를 하는 장소 역시 일상에 가까운 모습으로 지었을까 싶다. 로마시대에 지었다는 다리는 한눈에도 탄탄해 보인다.
다리를 건너면서 성수대교를 떠올린 것은 역시 세월호사고의 후유증일까? 이곳에서 만나는 집시들이 때로는 아기를 던져주는데, 아이를 받아들고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지갑을 훔친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는 나름대로의 대책을 궁리했다. 메스키타를 돌아보는 내내 아내와 팔짱을 끼고 다니기로 했다. 아기를 받아줄 팔이 없다는 표시를 한 셈이다.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팔짱을 끼고 다닌 시간보다 더 오래 팔짱을 껴본 것 같다.
역시 김희곤 교수의 <스페인은 건축이다>에서 코르도바 메스키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코르도바 메스키타는 흰색과 빨간색이 교대로 배열되는 독특한 도벨라스 양식으로 지어진 대표적인 건축물이라고 한다. 785년부터 짓기 시작한 메스키타는 원래 서고트인들이 교회를 세웠던 장소였다.
매스키타에 입장하면 서고트인들의 산 비센테(San Vicente)교회의 지하유적을 볼 수 있다. 무슬림들은 메카에서 짓던 사원형식을 고집하지 않고 이민족이 남긴 교회의 주춧돌과 기둥, 건축양식까지 고스란히 이용해 전형적인 교회의 평면구조를 갖춘 새로운 칼리프양식의 회교사원을 건축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조형진 가이드는 메스키타를 세우는데 들어간 기둥들은 이베리아 반도에 흩어져 있던 신전의 기둥을 뽑아다 쓴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기둥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기둥바닥의 깊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무너진 로마신전의 기둥을 재활용한 것이 옳은지 아니면 메스키타를 세우기 위해 로마신전의 기둥을 뽑아낸 것이 옳은지 헷갈린다.
회교사원은 기본적으로 기도소와 정원 그리고 미나렛이라고 부르는 뾰족탑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대개 '미흐랍'(Mihrab, 메카를 향해 있는 벽감(璧鑑) 형태의 작은 기도실)의 구석에 만들어지는 미나렛(minaret)은 정방형이며 장식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다. 규모가 큰 회교사원에 세워지는 미나렛은 아랍어로 '등대'를 의미한다.
사원에 소속된 무아진(mu'adhdhin)이 올라 하루 다섯 차례의 기도시간과 금요일의 공중예배를 알리는 아잔을 부르는 곳이다. 그런데 코르도바 매스키타의 미나렛에 종이 매달려 있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997년 산티아고 델 콤포스텔라를 침략한 알 만수르가 그곳의 대성당에서 떼어왔다는 종일까? 아니면 이곳에 성당을 만든 뒤에 걸어놓은 것일까?
회교사원의 정원에는 분수가 설치돼 있다. 무슬림들은 우리가 느끼는 다섯 감각이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라고 믿기 때문에 기도소에 들어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매스키타 정원의 분수 주변에는 올리브나무와 오렌지나무를 심어 햇빛을 가렸고, 정원을 돌아가면서 아치회랑을 두었다.
기도소 내부로 들어가면 먼저 끝없이 늘어서있는 기둥들과 기둥을 연결하는 이중의 아치에 압도된다. 벽돌 크기의 석회암과 붉은 벽돌을 교대로 쌓아 아래쪽에는 말발굽 모양으로, 위쪽에는 반원형으로 아치를 만들었다. 한편 천장 곳곳에는 원형 돔을 설치해 이중 아치에 빛이 스며들도록 해서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기도소의 북쪽 끝에는 알라의 방향을 가리키는 키블라가 설치되었고, 그 안에 미흐랍을 두었다. 키블라와 미흐랍의 벽은 자주색, 노란색, 연두색, 흰색, 검은색 타일을 조각내어 장식했는데, 그 문양들은 그라나다에서 설명한 아라베스크, 기하 그리고 캘리그래피로 구성돼 있다.
1236년 코르도바가 가톨릭 연합세력에 점령되고 세월이 흘러 1523년에 코르도바의 대주교는 메스키타를 성당으로 개조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코르도바 주민들이 공사를 막기 위해 끈질진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메스키타 한 가운데 세워진 기둥 4줄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대성당을 만들었다.
메스키타를 방문한 카를로스국왕은 대주교에게 "그대가 만든 것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대가 파손한 것은 이곳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것이다."라고 탄식했다고 하는데, 덕분에 이 사건을 계기로 그라나다의 알람브라궁전이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한다.
메스키타가 완공됐을 때 1013개였던 기둥 가운데 856개가 남아 메키스타의 화려한 모습을 전하고는 있지만, 기도소의 많은 공간이 가톨릭 성물을 전시하는 장소로 바꾸어 놓았다. 뿐만 아니라 메스키타를 가톨릭에게 내어주고 작은 기도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무슬림의 입장에서 보면 이슬람의 위대한 유산이 유린되고 있는 셈이다. 코르도바 메키스타는 이슬람과 가톨릭의 기묘한 동거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