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26]

양기화
발행날짜: 2015-03-13 05:30:00
  • 우리는 스페인으로 간다

파스텔 톤의 도시 리스본(3)

리스본의 명동거리 호시우광장에서 자유시간을 즐긴 다음 버스를 타고 벨렝지구로 이동했다. 벨렝지구에서는 벨렝탑과, 15~16세기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를 기념하는 발견의 탑(Padrao dos Descobrimentos) 그리고 성 제로니모 수도원을 볼 수 있다.

벨렝탑(좌)과 발견의 탑(우).
리스본의 수호성인을 기려 성빈센트탑이라고도 부르는 벨렝탑(Torre de Belem)은 1515년 마누엘1세의 하명으로 군사건축가 프란시스코 데 아루다(Francisco de Arruda)의 설계로 짓기 시작하여 1519년에 완공되었다. 15세기 초반 주앙2세 시절부터 리스본을 방어하기 위하여 테주강 어구에 요새를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12미터 폭에 30m 높이의 벨렝탑이 테주강의 북쪽 강가에 붙어 있지만, 건설 당시에는 테주강 가운데 있는 작은 섬에 세워졌는데, 1755년 리스본을 강타한 대지진의 영향으로 테주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섬이 강가에 가까워졌다. 벨렝탑은 테주강과 대서양의 경계를 표시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6각형의 보루와 직사각형의 4층탑으로 구성되는 벨렝탑은 리오즈(lioz)라고 부르는 연한 베이지색의 석회석을 사용하여 포르투갈 특유의 후기 고딕의 마누엘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하부 보루의 난간에는 강 쪽으로 17문의 대포를 거치할 수 있었다.

1층에는 지사의 방(Sala do Governador)으로 불리는 8각형의 방이 수조로 연결되고, 북동쪽과 북서쪽 구석으로는 망루로 연결되는 통로가 나있다. 2층에 있는 왕의 방(King's Hall)은 강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한쪽 벽만 있는 통로로 연결되며, 구석에 있는 벽난로는 3층에 있는 청중의 방(Sala das Audiencias)으로 연결되었다. 4층에는 아치형 천장이 있는 교회가 있다.

1580년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패한 다음 벨렝탑은 1830년까지 감옥으로 이용되었는데, 이곳 1층에 갇힌 죄수들은 하루 두 차례 밀물이 들어올 때마다 바닷물에 잠기지 않기 위하여 안간힘을 써야하는 끔찍한 곳이었다. 1655년에는 테주강으로 들어오는 배로부터 세금을 받는 세관과 배들이 테주강을 항해할 수 있도록 도항을 지원하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발견의 탑(Padrao dos Descobrimentos)은 15세기와 16세기 발견의 시대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설되었다. 1940년 6월에 열린 포르투갈 만국박람회의 상징으로 포르투갈의 건축가 호세 안젤로 코티넬리 텔모(Jose Angelo Cottinelli Telmo)가 기획하고, 조각가 레오폴도 데 알메이다(Leopoldo de Almeida)가 제작하였는데 1943년 6월 철거되었다.

1958년 11월 엔히크 왕자의 서거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사업으로 1940년 철거한 작품을 확대하여 시멘트와 장미색 돌로 만든 새로운 기념조형물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1960년 1월 완공하였다. 바람을 가득 안은 돛을 단 갈리온선의 선두에는 엔히크 왕자가 서고, 그 뒤로는 동쪽과 서쪽의 경사면을 따라서 각각 16명씩 대탐험시대를 대표하는 군주, 탐험가, 지도 제작자, 예술가, 과학자 그리고 선교사들을 석회석으로 조각하였다.

발견의 탑, 동쪽의 조각상(좌)과 서쪽의 조각상(우).
북쪽 계단의 측면에 있는 닻의 왼쪽 금속판에 새긴 명판에는 "바다의 길을 발견한 엔히크왕자께(AO INFANTE D. HENRIQVE E AOS PORTVGVESES QVE DESCOBRIRAM OS CAMINHOS DO MAR"라고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1460년으로부터 1960년까지 엔히크 왕자의 500주년에 월계관을 드립니다(NO V CENTENARIO DO INFANTE D. HENRIQVE 1460 – 1960)"라고 적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스코 다 가마는 동쪽에 있는데, 선두에 있는 엔히크 왕자의 뒤로 두 번째에 위치하고 있고, 처음으로 세계일주를 한 페르디난드 마젤란 역시 볼 수 있는데, 엔히크 왕자의 뒤로 다섯 번째 위치한다. 서쪽에는 포르투갈의 국민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가 엔히크 왕자의 뒤로 여섯 번째 위치한다.

발견의 탑 광장에 그려진 세계지도의 동아시아 부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발견의 탑 앞에 50미터 직경의 광장을 건설하여 선물하였고, 베이지색과 검은색 그리고 붉은색의 석회석으로 만든 콤파스 방위판(Rosa-dos-Ventos)을 광장에 새겼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콤파스방위판 보다 포르투갈 선단이 도착한 곳을 표시한 세계지도에 더 관심 많다고 한다. 지도의 동아시아에는 1514년 마카오, 1541년 일본에 포르투갈 배가 도착했다는 표시가 되어 있다.

그런데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독도를 마커펜으로 표기하고 한글로 '독도'라고 써넣는 열혈 한국관광객 때문에 공원관리인들이 골머리를 앓는다고 했다. 표기를 지워내도 또 누군가 다시 표시해 넣기 때문이다.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항로를 개척하기 전에 이미 명나라 영락제의 명을 받아 인도양 항로를 개척한 정화가 이미 유럽은 물론 세계일주를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이상훈 작가의 장편소설 [한복 입은 남자]는 조선왕조 세종대왕 때 하늘을 관측하는 천체 기구인 간의, 해시계인 앙부일구,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 등을 만들어낸 과학자 장영실이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에 착안하고 있다.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 그리고 명나라 정화의 행적에서 드러나는 빈틈을 교묘하게 엮었다.

즉 장영실이 명나라의 주목을 받는 점과 왕실 내부의 문제가 얽히는 바람에 장영실을 유럽으로 보냈고, 장영실은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나 지식을 전수했다는 것이다.

이상훈 작가는 정화함대의 사관 마환의 [영애승람]과 개빈 맨지스의 [1434]를 주요 논거로 인용하고 있다. '중국의 정화 대함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불을 지피다'라는 부제가 달린 [1434]에서 저자는 중국 황제의 공식사절단인 정화함대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닿았고, 피렌체에서 교황 유게니우스 4세를 알현했다는 것이다.

이때 중국 사절단은 예술, 지리학, 천문학, 수학, 인쇄술, 건축술, 제강법, 군사무기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전해주었고, 이 지식이 유럽 사회에 확산되면서 르네상스시대가 문을 열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각설하고 [한복 입은 남자]에서는 1442년 장영실이 합류한 정화의 함대가 아프리카의 해안을 따라 희망봉을 서쪽으로 돌아서 험난한 항해 끝에 포르투갈의 마데이라에 도달하였고, 스물다섯의 젊은 영주를 만났다고 했다. 이때 젊은 영주는 지중해로 들어가 교황을 만날 것을 권하게 된다. 그 젊은 영주는 엔히크 왕자를 의미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405년 명나라 영락제의 명을 받아 처음 인도양 항로개척에 나선 정화는 1430년 선덕제의 명에 따른 마지막 항해까지 모두 일곱 차례 인도양을 항해하여 호르무즈해협을 거쳐 메카에 이르기까지 모두 37개국을 방문한 당대 최고의 외교사절이었다고 이은상의 [정화의 보물선]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정화가 1435년 난징에서 사망했다고 했다.

1405년에 첫 번째 항해에 나선 정화의 선단은 길이 122m에 너비 50m, 9개의 돛대와 4개의 갑판 그리고 물이 새지 않는 칸막이벽을 갖춘 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2천톤급의 배 62척을 주축으로 모두 317척의 범선들로 구성되어 모두 2만 7870명이 승선하고 있었다고 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이끌었던 170명이 탄 70톤에서 300톤급의 배는 많아야 3개의 돛에 길이가 25m를 넘지 못하는 초라한 규모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정화의 선단에서 통역을 맡은 마환은 아랍인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중해를 장악했던 페니키아인들은 기원전 600년에 아프리카대륙을 일주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아라비아반도까지 진출한 정화가 아프리카를 돌아 지중해에 이르는 항로를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리스본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처음 횡단한 쌍엽기.
벨렝탑과 발견의 탑 사이에는 리스본을 출발해서 남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처음 횡단비행에 성공한 쌍엽기가 전시되어 있다. 1922년 가구 코티뉴(Gago Coutinho, 1869~1959) 대위와 사카두라 카브랄(Sacadura Cabral, 1881~1924) 대위는 내부 항법도구(코티뉴가 직접 만든 인위적 수평기가 달린 육분의)에만 의지한 채 수상비행기를 타고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까지 남대서양의 횡단비행에 최초로 성공한 것이다.

이 비행은 육분의가 사용된 최초의 항공 운항이란 점에서 항공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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